| 서울=한스경제 전시현 기자 | 달러나 유로 등 법정화폐에 가치를 1대 1로 연동한다고 해서 스테이블코인이 곧바로 ‘안전한 자산’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경고가 나왔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IMF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 ‘스테이블코인을 안정적으로 만들기(Making Stablecoins Stable)’를 통해 준비자산의 안전성 확보 못지않게 발행사가 위험자산에 손을 대지 않고도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별도의 수익 구조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며 스테이블코인의 본질적인 딜레마를 정면으로 지적했다.
보고서는 준비자산을 국채나 중앙은행 예치금과 같은 안전자산으로만 구성할 경우 대규모 상환 요구인 이른바 ‘런(run)’ 위험은 낮출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 경우 발행사의 수익성이 저하되어 시장에 코인을 공급할 유인이 약화되는 한계가 있다.
반대로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위험자산 보유를 허용하면 평상시에는 사업성이 커질 수 있으나 시장 위기 시에는 신뢰 붕괴와 함께 급격한 환매 압력이 한꺼번에 몰릴 수 있다고 IMF는 경고했다.
▲ 돈은 ‘설명’이 아니라 ‘신뢰’로 통한다
IMF가 보고서에서 내세운 핵심 개념은 NQA(No Questions Asked)다. 거래 상대방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주는 자산, 다시 말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용되는 자산’이 돼야 화폐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발행사의 건전성이나 준비자산 구성을 둘러싼 의심이 남아 있다면 스테이블코인은 화폐라기보다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금융상품에 가깝다는 얘기다.
실제 시장은 이런 취약성을 이미 여러 차례 보여줬다. 지난 2022년 붕괴한 테라USD(UST)는 대표적 사례다. UST는 충분한 법정통화 준비금 대신 차익거래 구조와 생태계 토큰인 루나의 가치에 기대 1달러 고정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시장의 신뢰가 흔들리자 구조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고수익을 좇아 몰렸던 자금도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지급수단’이 아니라 사실상 고수익 상품처럼 팔린 스테이블코인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 테라는 무너졌고 USDC도 흔들렸다
준비금 기반 스테이블코인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 2023년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당시 USDC는 한때 1달러 페그에서 크게 이탈했다. 문제는 준비금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준비금을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느냐였다. 비교적 보수적인 구조로 평가받던 USDC조차 상환 가능성을 둘러싼 의심이 번지자 디페깅을 피하지 못했다.
IMF는 여기서 규제의 초점을 다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논의가 주로 “무엇을 담보로 둘 것이냐”에 매달렸다면 앞으로는 “위험자산에 기대지 않고도 왜 발행할 수 있게 할 것이냐”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전자산 규제만 강화하면 공급은 줄고 수익성만 열어두면 런 위험은 커진다. 안정성과 사업성은 따로 떼어 볼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 승부처는 담보가 아니라 사업모델
대안으로 IMF가 제시한 것은 중앙은행 준비금과의 연계다. 중앙은행 준비금은 가장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은 자산인 만큼 스테이블코인 신뢰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다. 여기에 중앙은행이 준비금에 일정 수준의 보상을 제공하면 발행사가 굳이 위험자산에 손대지 않고도 코인을 공급할 유인이 생긴다고 IMF는 내다봤다. 결제 데이터 활용 같은 비투자성 수익원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다만 이 경우 개인정보 보호와 시장지배력 문제는 별도로 풀어야 할 숙제로 남는다.
정책 당국이 구분해야 할 대목은 발행사의 수익원과 보유자 이자·리워드다. 발행사의 수익은 시스템 유지와 공급 유인을 위한 재원이다. 반면 보유자에게 직접 이자나 리워드를 얹어주면 스테이블코인은 지급수단이 아니라 예금이나 투자상품 대체재로 변질될 수 있다. IMF가 스테이블코인을 안정적으로 만들려면 발행사의 지속 가능성은 따로 보완하되 보유자 보상은 신중히 다뤄야 한다고 보는 이유다.
각국 규제도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은 허가받은 발행사에 1대1 준비금 유지 의무를 부과하고 허용 자산을 현금, 연준 예치금, 단기 국채 등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동시에 단순 보유만으로 이자나 수익을 주는 구조는 경계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의 MiCA 역시 인가, 상환권, 저위험 준비자산 보유를 요구하면서 보유자 보상에 제동을 걸고 있다. 영국은 한발 더 나아가 단기 국채와 중앙은행 계정을 함께 활용하는 절충 모델을 검토 중이다. 안정성과 사업성을 동시에 잡겠다는 시도다.
▲ 결국 경쟁은 ‘허용’이 아니라 ‘설계’다
업계 안팎에서는 한국 역시 스테이블코인 논의를 더 이상 발행 주체의 범위에만 한정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액면가 상환청구권을 어디까지 법적으로 보장할지, 준비자산 범위를 어느 수준까지 제한할지, 중앙은행 준비금 접근을 허용할지 발행사의 수익원과 보유자 리워드를 어떻게 구분해 규율할지 등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디지털자산 업계 전문가는 “스테이블코인 규제의 핵심은 단순히 담보 장치를 강화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며 “위험자산에 기대지 않고도 발행 구조를 지속 가능하게 운영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까지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테라·루나 사태는 고수익 약속이 얼마나 쉽게 시장 불안과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고 USDC 사례는 보수적인 준비금 구조만으로도 신뢰 훼손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기 어렵다는 점을 드러냈다”며 “결국 각국의 경쟁은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할지 여부가 아니라 이를 실질적으로 현금에 준하는 지급수단으로 작동하게 할 제도를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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