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한국이 '망 사용료'를 둘러싼 디지털 통상 주도권을 놓고 정면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미 무역대표부(USTR)는 최근 공식 엑스(X) 계정을 통해 세계 어떤 나라도 자국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ISP)에 트래픽 전송에 따른 네트워크 사용료를 부과하지 않지만, 한국만은 예외라고 주장했다. 이는 USTR이 미국 수출업자들이 직면한 '외국 무역장벽' 사례를 열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한국의 망 사용료 문제를 대표적인 디지털 통상 걸림돌로 콕 집어 명시한 것이다.
하지만 국내 ICT 업계와 전문가들은 USTR의 이 같은 주장이 과도하게 편향된 해석이며 사실관계를 교묘하게 비틀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망 사용료나 이와 유사한 망 비용 분담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화두여서다.
실제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구글과 넷플릭스 등 대규모 트래픽을 유발하는 글로벌 플랫폼 사업자가 통신망 투자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이른바 '공정 기여'(Fair Contribution) 논의를 공식화한 상태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주요국 정부 내부에서도 관련 법안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진행 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만 유일하다"는 미측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국내 산업계가 더욱 공분하는 지점은 국내외 기업 간의 형평성 문제다. 현재 네이버와 카카오 등 국내 콘텐츠 제공사업자(CP)들은 트래픽 규모에 따라 매년 수백억 원에 달하는 망 이용 대가를 ISP에 지불하고 있다. 반면 국내 전체 트래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계 빅테크 기업들은 대가 지불에 소극적이거나 사실상 무상으로 망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국내 기업들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망 사용료를 둘러싼 양측의 논리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국내 통신업계는 동영상 스트리밍과 모바일 콘텐츠 소비가 급증함에 따라 글로벌 대형 CP들이 유발하는 트래픽 비중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으므로,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망 투자와 유지 비용을 함께 분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빅테크가 망 고도화 비용을 외면하는 것은 시장 원리에 어긋난다는 입장이다.
반면 미국 정부와 넷플릭스, 구글 등은 이용자가 이미 통신사에 인터넷 요금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CP에게 별도의 비용을 물리는 것은 명백한 '이중 과금'이라고 맞서고 있다. 또한 특정 콘텐츠 사업자에게 비용을 부과하는 행위 자체가 인터넷의 개방성과 '망 중립성' 원칙을 훼손하는 차별적 규제이자 무역 장벽이라는 것이 이들의 핵심 논리다. 이러한 갈등은 과거 SK브로드밴드와 넷플릭스 간의 장기 소송전과 트위치의 한국 사업 철수 논란 등을 거치며 국제적인 통상 쟁점으로 비화된 바 있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것으로 보인다. USTR은 지난달 발간한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NTE)를 통해 2021년 이후 한국 국회에서 외국 CP가 ISP에 망 사용료를 지급하도록 요구하는 다수의 법안이 발의된 점을 직접 언급했다. 특히 일부 한국 ISP가 스스로 콘텐츠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미국 CP가 부담한 비용이 결국 한국 내 경쟁사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논리까지 전개하며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업계에선 이번 USTR의 공세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특유의 '자국 우선주의'와 결합하여 더욱 거세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은 자국 플랫폼 기업의 수익성을 저해하는 한국의 정책을 본보기로 삼아, 유럽 등 타 지역으로의 규제 확산을 차단하려는 전략적 포석을 둔 것으로 풀이된다. 망 사용료뿐만 아니라 온라인 플랫폼 규제, 국내 정밀지도 반출 제한 등 미국 빅테크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들이 줄줄이 미국의 전방위 압박 리스트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특정 국적 기업을 차별하기 위한 정책이 아니다"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대미 통상 협상에서 디지털 분야의 수세에 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깊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망 사용료 문제가 단순한 비용 분담의 차원을 넘어선 상태"라며 "이해관계가 워낙 첨예한 만큼 장기간 평행선 협상이 이어지거나 최악의 경우 무역 보복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성대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Copyright ⓒ 비즈니스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