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이 세계 에너지 공급망의 화약고를 넘어, 미국과 이란 간의 치열한 '주권 전쟁터'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이 이란의 자금줄을 죄기 위해 해상 봉쇄를 강행하는 가운데, 이란은 해협 통제권을 아예 체계적인 수입원으로 만들려는 '통행료 카드'를 꺼내 들며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27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 및 위성 분석 업체들에 따르면, 지난 24일 하루 동안 약 400만 배럴의 이란산 원유를 실은 유조선들이 미군의 삼엄한 봉쇄망을 뚫고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아시아로 향했다. 그러나 이는 '바늘구멍'을 통과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같은 기간 1050만 배럴의 원유를 실은 유조선 6척은 미군에 의해 차단되어 이란 항구로 회항했다. 미 중부사령부(CENTCOM)는 지난 13일 봉쇄 시작 이후 총 37척의 선박을 우회시켰다고 공식 발표했다. 전쟁 이전 하루 평균 125~140척에 달하던 통항량은 현재 벌크선 몇 척이 간신히 지나는 수준으로 급감했다.
선박들은 미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위치 전송 장치(AIS)를 끄거나 허위 정보를 송신하는 등 '숨바꼭질' 작전을 펼치고 있다. 이 와중에 아랍에미리트(UAE)의 LNG 운반선이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액화천연가스를 실은 채 해협을 통과한 것으로 파악되어, 민간 상선들의 통항 가능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의 물리적 압박에 이란은 '경제적 제도화'로 응수하고 있다. 이란 의회는 해협을 지나는 선박에 통행료를 부과하기 위한 '호르무즈 해협 보안 계획' 법안 승인 절차에 돌입했다.
이란 중앙은행은 이미 리알화, 위안화, 달러, 유로화 등 4개 통화로 결제 가능한 계좌를 개설했다. 예상 통행료는 초대형 유조선(VLCC) 한척당 약 200만 달러(약 30억원) 또는 배럴(약 160ℓ)당 1달러다. 전쟁 전 물동량을 회복할 경우 이란은 연간 수십억 달러의 막대한 수익을 거둘 수 있게 된다. 알라에딘 보루제르디 의원은 이를 "전쟁과 제재 속에서 이란의 위상을 강화할 지속 가능한 수입원"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은 이란의 이러한 움직임을 '국제 수로에 대한 불법적 점거'로 보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마르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27일(현지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허가를 받고 통행료를 내야 한다면 그것은 '개방'이 아니다"라며 이란의 제안을 차단했다.
특히 루비오 장관은 이란이 국제 수로 이용료를 결정하는 체제를 '일상화(normalize)'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레드라인'을 분명히 했다. 이는 이란이 제안한 '선(先) 해협 개방 및 종전 선언, 후(後) 핵 협상' 카드가 사실상 미군을 철수시키고 해협 통제권만 인정받으려는 전략이라는 판단이 엿보인다.
설상가상으로 기대를 모았던 미·이란 간 2차 종전 협상은 이란 지도부 내부의 파벌 갈등으로 인해 결렬된 상태다. 협상단이 본국 보수 파벌의 눈치를 보느라 재량권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란은 통행료 징수를 강행하며 실질적 지배력을 과시하려 할 것이고,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 말라카 해협까지 감시망을 넓히며 압박 수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시장 관계자는 "LNG 운반선이 처음으로 통과했다는 신호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이란의 통행료 징수가 법제화될 경우 국제 해운업계의 비용 부담과 함께 지정학적 리스크가 '뉴 노멀'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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