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우리 술의 이름에는 빚은 사람의 마음이 배어 있다. 어떤 술은 꽃의 이름을 빌리고, 어떤 술은 물맛 좋은 우물에서 이름을 얻는다. 또 어떤 술은 술이 완성되는 찰나의 풍경을 그대로 품는다. 옥로주(玉露酒)가 그렇다.
‘옥로’는 옥 같은 이슬이라는 뜻이다. 술을 증류할 때 맑은 방울이 한 점씩 맺혀 떨어지는 모습이 옥구슬처럼 보였다. 그 이슬 같은 술방울에서 이름이 나왔다. 옥로주는 오래된 가양주의 기술과 한 가문의 시간이 함께 깃든 전통 증류주다.
옥로주는 경기도 군포와 안산 일대에서 전승돼 온 술이다. 한때는 ‘군포당정옥로주’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으나, 현재는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로 옮겨 ‘옥로주’라는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다. 1994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국가유산 체계가 바뀐 뒤에는 경기도 무형유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식품명인 제10호 유민자 명인이 맥을 이어오고 있다.
옥로주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화려한 향료나 낯선 재료가 아니다. 백미와 율무, 밀, 약쑥, 물. 재료만 놓고 보면 소박하다. 그러나 재료들이 누룩이 되고, 밑술이 되고, 술덧이 되고, 마침내 증류기 끝에서 한 방울의 술로 떨어지기까지는 오랜 손길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전통주 이름에 ‘옥’이라는 글자는 자주 등장한다. 옥은 보석의 이름이지만, 옛사람들에게는 값비싼 돌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맑고 귀하며, 단단하고 반듯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술 이름에 옥이 들어가면 대개 맑음과 귀함, 정성스러움을 함께 뜻했다.
옥로주는 그중에서도 이름과 제조 장면이 바로 맞닿아 있는 술이다. 술덧을 끓이면 알코올 성분이 증기로 올라간다. 그 증기가 식으면 다시 액체가 되고, 증류기 끝에서 한 방울씩 떨어진다. 방울이 옥 같은 이슬처럼 맑다 해서 옥로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좋은 이름은 술을 설명한다. 옥로주라는 이름도 그렇다. 술은 투명하게 떨어지는 술방울, 증류주의 맑은 기운, 오래 숙성된 부드러움을 한 단어 안에 품고 있다.
◇백미와 율무, 약쑥이 빚은 향
옥로주의 개성은 재료에서 시작된다. 주재료는 백미와 율무다. 누룩을 만들기 위한 밀, 약쑥이 더해진다. 일반적인 쌀소주와 달리 율무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 옥로주의 가장 큰 특징이다.
율무는 술에 고소한 향을 더한다. 쌀이 깨끗한 바탕을 만든다면, 율무는 위에 둥글고 구수한 향을 입힌다. 옥로주가 도수 높은 증류주이면서도 거칠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율무 특유의 부드러운 곡물 향이 술맛을 한층 눌러주고 감싸준다.
약쑥은 누룩에 들어간다. 강하게 튀는 향이라기보다는 뒤에서 은근히 받쳐주는 향이다. 술을 마신 뒤 남는 풀 내음, 약간의 쌉싸래함, 깔끔한 후미에 약쑥의 존재가 스며 있다. 옥로주에서 율무가 맛의 몸통을 만든다면, 약쑥은 향의 끝을 정리하는 재료라 할 수 있다.
누룩 재료로는 밀기울, 율무가루, 약쑥, 용수가 쓰인다. 술 빚기에는 백미, 율무, 누룩, 용수가 들어간다. 많은 것을 넣어서 특별해지는 술이 아니다. 익숙한 재료를 얼마나 섬세하게 다루느냐가 옥로주의 맛을 가른다.
◇누룩방에서 시작되는 옥로주의 맛
옥로주 빚기는 누룩 만들기에서 출발한다. 전통주에서 누룩은 부재료가 아니다. 술맛의 뿌리다. 곡물을 술로 바꾸는 발효의 힘이 누룩에서 나온다. 술의 첫 향도 누룩에서 결정된다.
옥로주의 누룩은 밀과 율무를 바탕으로 만든다. 분쇄한 밀과 율무에 끓여 식힌 물을 넣어 반죽한다. 어느 정도 숙성시킨 뒤 마른 약쑥을 넣어 다시 반죽한다. 반죽은 깨끗한 천에 싸서 밟고, 모양을 잡아 누룩방에서 띄운다. 볏짚을 깐 선반 위에서 온도와 습도를 살피며 기다리는 과정이 이어진다.
잘 뜬 누룩은 옅은 노란빛을 띠고 곡자 특유의 향을 낸다. 밀의 구수함, 율무의 고소함, 약쑥의 은은한 향이 함께 배어 있다. 이후 어떤 술맛이 날지는 이 단계에서 절반쯤 정해진다.
누룩은 서둘러 만들 수 없다. 온도가 맞지 않으면 제대로 뜨지 않는다. 습도가 지나치면 잡균이 끼기 쉽다. 누룩을 만드는 일은 손의 감각과 기다림이 필요한 과정이다. 옥로주가 오래된 가양주로 전승될 수 있었던 것도 감각이 집안에서 수 세대에 걸쳐 이어졌기 때문이다.
◇식힌 고두밥 위에 술밑을 세우다
누룩이 준비되면 쌀과 율무를 쪄 고두밥을 만든다. 고두밥은 술을 빚기 위해 찐 된밥이다. 밥알이 질척해도 안 되고, 너무 말라도 안 된다. 누룩과 잘 어우러질 만큼 익어야 한다. 발효가 잘 일어날 만큼 알맞게 식어야 한다.
누룩 만들기 다음이 고두밥 식히기다. 넓은 채반에 고두밥을 펼쳐 김을 빼고 온도를 낮춘다. 이 과정이 쉬워 보여도 중요하다. 너무 뜨거운 상태에서 누룩과 섞으면 발효에 필요한 미생물이 상할 수 있다. 반대로 지나치게 식어버리면 발효의 출발이 더뎌진다.
식힌 고두밥에 누룩과 물을 더해 주모를 만든다. 주모는 밑술, 술밑이라고도 한다. 본격적인 술덧을 만들기 전에 효모를 충분히 키우는 과정이다. 고두밥과 누룩, 물을 고루 섞어 항아리에 담고, 발효가 살아날 때까지 기다린다.
주모가 힘 있게 살아야 다음 단계가 안정된다. 술이 잘 되는 집은 밑술에서 이미 냄새가 다르다고 한다. 곡물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지 않고, 은근한 단내와 발효 향이 살아나야 한다. 옥로주도 이 밑술이 제대로 서야 율무의 향과 누룩의 힘이 덧술로 이어진다.
◇술덧이 끓어오르는 시간
주모가 가장 왕성해질 때 덧술을 담근다. 백미와 율무로 다시 고두밥을 지어 밑술에 더하고, 물을 부어 술덧을 만든다. 이때부터 항아리 안에서는 발효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처음 며칠은 술덧이 힘차게 오른다. 큰 거품이 생기고 탄산가스가 올라온다. 곡물 냄새 사이로 과실향이 피어난다. 발효가 진행되면 커다란 거품이 많이 생기고 과실향이 난다. 시간이 지나면 거품은 잦아들고, 구슬 같은 잔거품으로 변한다. 온도도 조금씩 내려간다.
술을 빚는 사람은 이러한 변화를 본다. 거품이 어떤 모양인지, 향이 무겁지는 않은지, 술덧의 온도가 너무 오르지는 않았는지 살핀다. 전통주는 온도계와 계량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마지막 판단은 사람의 눈과 코와 손끝에 달려 있다.
옥로주의 술덧은 쌀과 율무가 함께 들어간다. 쌀은 발효의 바탕을 만든다. 율무는 술의 향과 질감을 다르게 만든다. 발효가 끝날 무렵 항아리 안에는 처음 재료의 모습과 전혀 다른 세계가 생긴다. 곡식은 술이 되고, 누룩은 제 역할을 마치며, 술덧은 증류를 기다린다.
◇술덧이 끓어오르는 시간
발효가 끝나면 술을 걸러낸다. 술덧을 증류기에 옮기기 전, 체나 용수를 이용해 액체와 고형분을 나누고 술 상태를 확인한다. 술 빚는 순서에서 다섯 번째 단계가 ‘술 걸러내기’인 이유다.
다음은 증류다. 옥로주는 이 단계에서 비로소 자기 이름을 얻는다. 발효된 술덧을 고주리나 동고리 같은 전통 증류 도구에 넣고 가열한다. 술덧이 끓으면 알코올 성분이 증기로 올라가고, 식으면서 액체가 된다. 액체가 관을 타고 내려와 한 방울씩 떨어진다.
처음 나오는 술은 도수가 높다. 뒤로 갈수록 도수는 낮아진다. 제조자는 초류와 후류를 알맞게 나누고 섞어 원하는 도수와 맛을 맞춘다. 옥로주는 대체로 40도 안팎의 증류주로 완성된다.
증류기 끝에서 떨어지는 술방울은 작지만, 안에는 긴 시간이 담겨 있다. 누룩을 띄운 시간, 고두밥을 식힌 시간, 주모를 기다린 시간, 술덧이 끓어오른 시간이 모두 한 방울 안으로 모인다.
◇항아리 속에서 부드러워지는 시간
증류가 끝났다고 바로 옥로주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증류 직후의 술은 도수가 높고 기운이 날카롭다. 술을 항아리에 넣어 숙성시키면 맛이 한층 부드러워진다.
옥로주는 전통적인 소주 제조 방식에 따라 항아리 숙성을 거친다. 증류주를 소주 숙성 항아리에 넣어 9개월에서 12개월가량 숙성한다. 항아리 안에서 술은 서서히 안정된다. 강한 알코올 향은 부드러워진다. 율무의 고소함과 약쑥의 은은한 향은 차분하게 정리된다.
항아리는 술을 품는 용기이면서 동시에 숨 쉬게 하는 용기다. 전통주에서 항아리 숙성이 중요한 까닭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술맛의 모서리가 깎이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둥글어진다. 옥로주의 부드러운 목 넘김은 증류 기술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문의 손맛으로 이어진 전승의 맥
옥로주의 역사는 한 가문의 술에서 시작된다. 유씨 가문에서 1880년경부터 가양주로 빚어온 것으로 전해지며, 뿌리에는 유성근이 있다. 유성근은 부친을 따라 전북 남원 산동으로 이주했다. 남원에서 쌀과 잡곡을 원료로 술을 빚었다고 한다.
이후 가문은 경남 하동으로 옮겨갔다. 하동에서는 집 주변에 율무가 많이 재배됐고, 자연스럽게 술에도 율무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옥로주가 오늘날처럼 율무를 중요한 원료로 삼게 된 배경이다.
1947년에는 유양기가 경남 하동의 양조장에서 전통 가양주 방식의 소주를 생산하며 ‘옥로주’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군포시 당정동 양조장에서 술을 만들면서 ‘군포당정옥로주’라는 이름이 생겼다.
유양기 사후에는 큰딸 유민자가 제조 비법을 이어받았다. 유민자 명인은 옥로주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이후 장남 곽철이 전수자로 지정되며 5대째 가업이 이어지고 있다. 유성근, 유학문, 유병용, 유양기, 유민자로 이어지는 흐름과 아래 전수교육사·이수자들의 계보로 이어진다.
전통주는 문서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레시피를 적어둘 수는 있지만, 안의 감각까지 모두 글로 남기기는 어렵다. 누룩이 제대로 떴는지, 고두밥이 알맞게 식었는지, 술덧 향이 잘 익어가는지, 증류를 어느 지점에서 끊어야 하는지 같은 판단은 오랜 경험 속에서 몸에 밴다. 술은 손의 기억으로 이어져 왔다.
◇‘군포당정옥로주’에서 ‘옥로주’로
옥로주는 오랫동안 ‘군포당정옥로주’로 불렸다. 지정 당시 기능보유자가 군포시 당정동 양조장에서 술을 제조한 데서 나온 이름이다. 하지만 옥로주의 전승 배경은 군포에만 머물지 않았다. 남원과 하동을 거쳐 군포로 이어졌고, 기능보유자가 오랜 기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도에 거주하면서 안산과도 깊은 관련을 맺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2023년 경기도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명칭은 ‘군포당정옥로주’에서 ‘옥로주’로 바뀌었다. 지명 중심의 이름에서 술 자체의 이름으로 돌아온 셈이다.
1994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던 옥로주는 2021년 문화재 지정번호 폐지 이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재지정됐고, 2024년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경기도 무형유산으로 불리게 됐다. 이름과 제도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술의 맥은 이어지고 있다.
옥로주는 도수가 있는 술이다. 가볍게 들이켜는 술이라기보다 천천히 향을 맡고 조금씩 음미하는 증류주에 가깝다. 첫인상은 맑고 단단하다. 입에 머금으면 곡물 향이 먼저 올라오고, 뒤이어 율무의 고소함이 느껴진다. 약쑥의 향은 강하게 치고 나오지 않는다. 대신 삼킨 뒤 잔향처럼 남는다.
목 넘김은 생각보다 부드럽다. 높은 도수의 술이 주는 뜨거움은 있지만, 끝이 거칠게 끊어지지 않는다. 율무가 주는 둥근 질감과 항아리 숙성에서 오는 안정감이 인상을 만든다. 뒤끝은 비교적 깨끗하다. 때문에 옥로주는 ‘강하지만 험하지 않은 술’에 가깝다. 옥로주는 일반적인 쌀 증류주와 다른 개성을 갖게 된다.
옥로주는 빠르게 만들어지는 술이 아니다. 누룩을 띄우고, 고두밥을 식히고, 주모를 세우고, 술덧을 발효시키고, 술을 걸러 증류한 뒤, 다시 항아리에서 숙성한다. 술 빚는 순서만 놓고 보면 짧게 보이지만, 각 단계마다 사람의 손과 판단이 들어간다.
옥로주는 요란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술이 아니다. 율무와 약쑥이라는 재료도, 항아리 숙성도, 증류기 끝에서 떨어지는 술방울도 모두 조용하다. 다만 조용한 과정이 모여 맑은 술 한 잔을 만든다.
증류기 끝에서 떨어지는 맑은 한 방울. 이슬 같은 술방울이 오늘까지 이어져 옥로주가 됐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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