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 미국과의 종전 협상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레드라인(한계선)’을 공식화하며 배수진을 쳤다. 특히 미국이 요구해 온 핵·미사일 프로그램 폐기를 협상 테이블에서 원천 배제하겠다는 강경 입장을 밝히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최대 압박’과 이란의 ‘전략적 자산 고수’가 정면충돌하는 양상이다.
26일(현지시간) 이란 반관영 타스님 통신과 국영 언론들에 따르면,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은 중재국인 파키스탄을 통해 미국 측에 서면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메시지에는 전쟁 종식을 위한 이란의 4가지 핵심 요구사항이 담겼다.
이란이 제시한 4대 쟁점은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새로운 법적 체제 도입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 문제 해결 ▲추가적인 군사 공격 방지를 위한 법적·구속력 있는 보장 ▲이란에 대한 해상 봉쇄 및 불법 제재의 즉각적 종료다.
특히 이란이 이번 협상안에서 핵 및 미사일 프로그램 등 소위 ‘전략적 자산’은 논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이란 국영 프레스TV는 “이번 순방과 메시지 전달은 핵 문제와 무관하다”며, 전쟁 종식 조건은 철저히 이란의 주권적 요구에 따라야 한다고 선언했다.
아라그치 장관의 이번 행보는 지난 24일부터 파키스탄, 오만, 러시아를 잇는 연쇄 순방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는 25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셰바즈 샤리프 총리와 아심 무니르 육군참모총장을 만나 중재 노력에 사의를 표하는 한편, 이란의 원칙적 입장을 설명했다.
이어 26일에는 오만으로 이동해 하이삼 빈 타리크 술탄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의 항행 안전과 페르시아만 보안 문제, 그리고 파키스탄의 중재로 진행 중인 종전 협상 현황이 심도 있게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파르스 통신은 아라그치 장관이 오만 방문 직후 다시 파키스탄으로 귀환해 미국에 전달할 ‘서면 레드라인’을 파키스탄 측에 인계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이란이 단순히 수세적인 입장에서 협상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정세를 주도적으로 규정하겠다는 외교적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아라그치 장관의 강경 행보는 최근 이스라엘 언론을 통해 보도된 ‘갈리바프 국회의장의 협상 대표직 사임설’과 맞물려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중도 실용파로 분류되던 갈리바프 의장이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강경파의 개입에 반발해 물러났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아라그치 외무장관이 IRGC의 기류를 반영한 ‘강경 요구안’을 들고 전면에 나선 모양새다. 실제로 아라그치 장관은 “전쟁을 끝내는 어떤 합의도 미국이 아닌 이란의 조건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며 협상의 주도권이 이란에 있음을 강조했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는 “시간은 이란 편이 아니다”라며 해상 봉쇄를 통한 고사 작전을 지속하고 있다. 반면 이란은 ‘핵 카드’를 협상에서 제외함으로써 미국의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호르무즈 해협의 법적 지위 변경과 배상금을 요구하며 역공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이란이 러시아를 순방 일정에 포함시킨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의 압박에 맞서 우방국인 러시아와의 결속을 과시함으로써 협상력을 높이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의 ‘핵 제외 4대 요구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극히 낮은 상황에서, 중재국들을 통한 간접 대화마저 평행선을 달림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과 해상 봉쇄 국면은 당분간 장기화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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