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서원 작가] 전시 전체는 이 세 축을 중심으로 더 넓게 퍼져나간다. 픽시 랴오의 사진은 함께 있는 시간이 반드시 극적인 사건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히만 청의 회화는 쓰이지 않은 것들, 혹은 아직 문장이 되지 못한 상태를 화면 위에 남긴다. 네빈 마무드의 조각은 놀이와 욕망, 순수함과 관능성 사이의 경계를 흔들며, 조니 네그론의 회화는 외부의 재난이 만들어낸 강제적 멈춤 이후의 회복 가능성을 암시한다. 빅토리아 기트만의 회화는 바라본다는 행위가 얼마나 긴 시간과 집중을 요구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Dolce Far Niente’는 ‘느림’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소비하지 않기 위해 여러 방향의 작업들을 배치한다. 멈춤은 어떤 이에게 휴식일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장애와 접근성의 문제이고, 어떤 이에게는 성장과 회복의 시간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불확실한 현실을 견디는 인식의 태도다. 같은 멈춤이라도 그것이 놓인 몸과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의 삶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결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쉬는 시간조차 효율적으로 관리되고, 취미조차 성과의 언어로 번역된다. 이런 조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꽤 적극적인 선택이 된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 선택을 거창한 저항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들은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말한다. 난간을 다시 볼 것. 굳은 흙 안에 남은 생장의 시간을 볼 것. 세계를 이해하겠다는 욕망을 잠시 늦출 것. 이 구체성 때문에 전시는 감상적인 위로로 흐르지 않는다. 멈춤은 아름다운 분위기가 아니라 하나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몸이 기대는 조건, 물질이 변화를 견디는 조건, 생각이 성급한 결론을 피하는 조건.
결국 ‘Dolce Far Niente’가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쉴 것인가”보다 “무엇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하는가”에 가깝다. 그리고 그 질문은 전시장을 나설 때 추상적인 여운으로 남지 않는다. 오히려 꽤 현실적인 판단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빠르게 처리하려 하고, 너무 많은 장면을 즉시 이해하려 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결과로 환산하려 한다. 이 전시는 그 속도를 잠시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속도 자체가 누구의 몸과 시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는지 묻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설득력 있었던 것은 ‘쉼’이라는 주제 자체보다, 그 주제를 물질과 몸, 인식의 문제로 나누어 보여준 구성 방식이었다. 엠 케트너의 목조와 세라믹 구조, 세 오의 도자 정원, 바심 마그디의 영상은 각각 다른 자리에서 같은 문제를 붙잡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평소에는 너무 빨리 지나쳐 보이지 않았던 구조를 드러내고, 이미 굳어버린 것 안에서 느리게 남아 있는 변화를 보게 하며,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었던 방식의 성급함을 되돌아보게 한다.
멈춤을 낭만화하지 않는 대신 멈춤이 얼마나 많은 조건을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기대는 몸, 기다리는 물질, 판단을 늦추는 시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 아래에는 사실 이토록 많은 움직임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들은 전시장 안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우리가 시간을 대하는 방식을 다시 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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