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런던.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이 아직 건재하던 시절, 퀘이커교도 집안의 여덟 번째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 에드워드 프라이 경(1827~1918)은 판사였고, 삼촌 조지프 스토어스 프라이(Joseph Storrs Fry, 1826~1913)는 그 유명한 '프라이스 초콜릿' 회사를 경영했다. 요컨대, 법과 초콜릿으로 먹고사는 집안이었다.
이름하여 사라 마저리 프라이(Sara Margery Fry, 1874~1958). 훗날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타임스지는 '열정적인 개혁가', 어느 부고란은 '약자의 챔피언'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있을 때 본인이 즐겨 쓴 표현은 훨씬 겸손했다. '아마추어'. 스스로를 '전문가도 아닌 아마추어'라 부른 그 여성이 20세기 세계 형사 사법체계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아마추어란 원래 '사랑하는 것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 그 말이 맞다. 마저리는 정의를 사랑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공부? 허락받은 뒤에야 가능했다
집안에서 마저리가 대학에 가는 것은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 아니었다. 오빠 로저 프라이(1866~1934)는 미술을 하라고 권했다. 그는 훗날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이자 미술비평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으니, 예술적 감각은 있었겠지만 마저리의 재능을 파악하는 데는 완전히 빗나갔다.
결국 부모의 허락을 얻어낸 끝에, 1894년 옥스퍼드 서머빌 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집으로 돌아갔다가, 1899년 다시 서머빌로 돌아와 사서로 일했다. 1904년에는 버밍엄 대학교 여성기숙사 사감으로 부임했다. 연봉은 60파운드. 당시로서도 결코 넉넉한 금액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여기서 학생들과 함께 숨 쉬며 교육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키웠다.
경제적 독립은 뜻밖의 방식으로 찾아왔다. 1913년 삼촌 조지프 스토어스 프라이가 세상을 떠나며 상속을 받게 되었고, 이듬해 버밍엄에서의 직위를 내려놓았다. 초콜릿이 개혁가를 만든 셈이다. 역사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적지 않다.
전쟁터에서 감옥으로, 한 여성의 전환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마저리는 퀘이커교도 특유의 현장감각을 발휘했다. 1915년부터 프랑스 마른 전선에서 퀘이커 구호활동을 조직했다. 총이 아니라 빵과 담요로 전쟁에 맞선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그녀에게는 새로운 분노가 생겼다. 양심에 따라 징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지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감옥에서 겪은 참상을 친구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형사 사법개혁에 뛰어드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언니 조운 매리 프라이(Joan Mary Fry, 1862~1955)가 퀘이커교도 교도소 교목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1918년 말, 44세의 마저리는 '형사개혁연맹(Penal Reform League)'의 명예총무 역할을 맡기로 했다. 보수는 없었다. 상속받은 재산이 있었으니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부터, 그녀의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
감옥을 바꾸자, 조용하지만 집요한 혁명
마저리는 작은 두 단체가 영국정치권 안에서 각자 목소리를 내봤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곧 파악했다. 형사개혁연맹과 더 오래된 단체인 하워드 협회(Howard Association)를 통합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협회총무 세실 리슨(Cecil Leeson)과 협의해 합병을 추진했다.
1921년, 두 단체는 합쳐져 '하워드 형사개혁연맹(Howard League for Penal Reform)'이 되었고, 마저리는 1926년까지 연맹의 총무를 맡았다. 같은 해 1921년, 그녀는 영국최초의 여성 판사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22년에는 런던 여성전용 교도소인 홀로웨이 교도소의 교육자문관이 되었다.
그녀가 이룬 것들을 나열하면 숨이 찬다. 재소자의 최소권리에 대한 국제기준을 요구한 운동은 결국 유엔협약으로 이어졌고, 범죄피해자에 대한 국가보상제도의 기초를 놓았으며, 사형제 폐지운동을 이끌었고, 범죄학을 학문으로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피해자 보상제도는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이름과 함께 기억된다. 마저리는 1951년 저서 '법의 팔(Arms of the Law)'에서 피해자 보상원칙을 공식 제안했고, 이 운동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1964년 영국에서 범죄피해 보상제도로 현실화되었다. 죽은 뒤에도 씨앗이 꽃을 피웠다. 뉴질랜드는 1963년 세계최초로 강력범죄 피해자를 위한 국가보상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이후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차례로 도입했다.
학자의 탈을 쓴 운동가, 서머빌 총장 시절
1926년부터 1930년까지 마저리는 모교인 옥스퍼드 서머빌 칼리지의 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그녀 본인은 이 자리를 그리 편안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강단보다 거리가 맞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재임 중 그녀는 학생들을 '재학생(undergraduates)'이라 하지 않고 '학생(students)'이라 불렀다. 소소해 보이지만, 이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위계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것. 덤으로, 학생들에게 집 벽난로를 금색으로 칠하라고 권고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개혁가도 가끔은 엉뚱하다.
1919년 새로 설립된 대학 지원 위원회(University Grants Committee)에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948년까지 활동했고,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영국방송공사(BBC) 이사를 역임했으며, 1942년부터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인 '브레인스 트러스트(The Brains Trust)'의 패널로 활약하며 대중의 얼굴이 되었다.
한국에 묻는다, 형사 사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자, 이제 2020년대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마저리가 1918년 처음 형사 개혁 연맹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영국의 감옥은 응보와 격리만을 목적으로 했다. 죄를 지었으니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현실은 어떨까?
한국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1997년 이후 집행은 없지만 법적으로 폐지되지 않아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될 뿐이다. 마저리가 평생 싸운 바로 그 지점이다. 그녀는 국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범죄를 막는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고, 역사는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교도소 과밀수용 문제도 고질이다. 재소자를 교육하고 사회로 돌려보내는 데 투자하기보다, 여전히 '가두고 벌주는' 관성이 강하다. 마저리가 1922년 홀로웨이 교도소 교육자문관으로 들어가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보자. 그녀는 감옥을 덜 가혹하게 만드는 것이 사회전체를 안전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데이터로 증명되었다.
피해자 보상제도는 어떤가. 한국도 범죄피해자 구조금제도가 있다. 하지만 접근성, 금액의 현실성, 절차의 복잡함은 여전히 개선이 필요하다. 마저리가 '피해자도 사고피해자만큼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외친 1950년대의 논리는, 70년이 지난 한국에서도 여전히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한국사회는 '약자의 편'에 선 목소리가 얼마나 공론장에 닿고 있는가? 마저리는 선출직 공무원이 아니었다. 정당대표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유엔협약을 이끌어냈다. 그 힘은 집요한 공부, 끊임없는 네트워크, 그리고 쉬지 않는 현장감각에서 나왔다. 그녀는 '그림자 속의 권력'을 행사한 정책자문가였고, 선거 없이도 역사를 바꾸었다.
84년 삶의 마지막 문장
1958년 마저리가 84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부고를 써야 했던 기자들은 그녀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개혁가? 교육자? 여성운동가? 방송인? 국제로비스트?
데일리 헤럴드의 기자가 가장 정확하게 짚었다. "약자의 챔피언." 그게 전부였고, 그게 전부이기에 충분했다.
마저리 프라이는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아마추어치고는 너무 많은 것을 바꿨다. 세계의 감옥이 조금 더 인간다워진 것, 피해자가 나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사형대 앞에서 한 번 더 멈추게 된 것, 이 모든 것에 그녀의 손길이 닿아 있다.
지금 이 순간, 한국의 어딘가 에서도 누군가가 '아마추어'라 불리며 약자의 편에 서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마저리의 삶은 말한다. 계속하라고. 세상은 그런 아마추어들이 바꿔왔다고.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