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문영서 기자】 전 세계가 중동전쟁발 에너지 가격 급등과 인공지능(AI)으로 인한 고용 불안 확산이라는 이중 충격에 직면했다. 이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미국과 한국이 비슷한 시기 매파적 성향이라는 새 중앙은행 수장을 맞게 됐다.
25일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세계경제 성장률은 3.1%로 관측됐다. 중동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 기대 상승 등으로 기존 전망보다 0.2%포인트 하향한 수준이다. 세계경제에 하방리스크가 지배적인 상황으로,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석유·가스 사용량이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약 4%로 유럽의 두 배에 달해 에너지 충격에 더 크게 노출돼 있다고 IMF는 지적했다.
여기에 AI 도입 가속화까지 맞물리며 노동시장 불안도 심화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 경제활동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IT·전문직 분야 20~30대 취업자가 올해 들어 13만 명 넘게 감소했다는 통계가 나왔고, 한국은행도 챗GPT 출시 이후 3년간 주요 IT·전문서비스 업종에서 청년 고용이 일제히 줄었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이러한 거시경제 환경 속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케빈 워시 의장 후보자는 지난 21일(현지시간) 상원 금융위원회 인준 청문회에 출석했고, 신현송 한국은행 신임 총재는 같은 날 취임식을 가졌다. 두 사람은 모두 매파로 분류되는 경제학자 출신으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위기가 동시에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상황에 통화정책을 맡게 됐다.
워시, 트럼프 대통령 압박과 인플레이션 사이 줄타기
케빈 워시는 지난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연준 역사상 최연소 이사로 재직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1월 그를 오는 5월 15일 임기가 만료되는 제롬 파월 총재의 후임으로 지명하며 ‘완벽한 후보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청문회에서 워시는 연준의 ‘체제 전환(regime change)’을 강조했다. 연준이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등 현행 운영 방식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워시는 본인이 ‘절사 평균(trimmed mean)’ 물가 지표를 선호한다며 물가 분석 시스템 또한 근본적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개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절사평균 물가지표란 개별 품목 물가 상승률을 나열한 후 변동폭이 심한 상·하위 극단치(보통 24%~30% 내외)를 제거하고 남은 품목의 가중평균이다. 기존 연준이 이용하던 근원 PCE 지표는 식품과 에너지 품목을 제외한 물가로, 꾸준히 상승세를 지속한 반면 절사평균 물가지표는 지난 2022년 이후 하락세다. 이는 즉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에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로 작용한 인플레이션 우려를 반박할 수 있는 지표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하나증권 허성우 연구원은 “절사평균 PCE는 구조적으로 상단 항목을 더 많이 제거하도록 설계돼 있다”며 “물가 분포가 양의 왜곡을 보이는 상황에서 기계적으로 상단에 있는 변동성 높은 항목을 제거한다면, 실제 인플레이션 압력을 반영하는 고물가 항목들이 대거 누락되어 지표가 헤드라인보다 낮게 산출되는 ‘하향 편의’가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이어 “워시가 선호한다고 밝힌 절사평균 PCE의 최근 하락세를 근거로 금리 인하 기대감을 반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라며 “오히려 유가 충격에서 소비는 여전히 탄탄하며, 노동 시장은 다소 과열 국면에 머물러 있다”고 덧붙였다.
캐빈 워시는 트럼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트럼프의 꼭두각시(sock puppet)가 될 것이냐는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금리 결정도 사전에 약속하거나 확정하도록 요구한 적 없으며, 설령 그랬더라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워시의 청문회 몇 시간 전 CNBC와의 인터뷰에서 워시가 즉시 금리를 인하하지 않으면 실망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바 있다.
기존 케빈 워시는 AI가 생산성을 끌어올려 경제의 잠재 성장률을 빠르게 높이고 있다는 주장을 지지해왔다. 이를 통해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금리 인하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준의 정치적 독립성을 강조하며 매파적 기조를 유지하되 AI 낙관론을 통한 금리 인하 여지 또한 열어둔 셈이다. 위기 시에만 한시로 운영하다 현재 상시화된 연준 대차대조표(현재 약 6조7000억달러) 또한 축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연준의 대차대조표란 연준이 보유한 자산(국채, 모기지 채권 등)과 부채(화폐 발행액, 은행 지급준비금 등)를 기록한 재무제표로, 미국 금융 시장의 유동성 규모와 통화 정책(양적완화/긴축) 방향을 보여주는 핵심 지표다. 자산이 늘면 시장 유동성 증가(호재), 줄면 감소(악재)를 의미한다.
다만 인준 전망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공화당의 톰 틸리스 의원은 법무부의 파월 총재 수사에 반발하며 수사가 철회되기 전까지 인준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청문회에서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원 금융위원회는 공화당이 12석, 민주당이 10석으로, 공화당이 단 2석 우위기 때문에 틸리스 의원의 이탈만으로도 인준이 막힌다.
신현송, 가계부채·고환율 관리에 디지털자산까지
신현송 한국은행 신임 총재는 국제결제은행(BIS)에서 10년 넘게 수석경제학자·통화경제국장을 역임한 국제금융 전문가다. 비유럽·비미국 출신으로는 최초로 BIS 경제보좌관에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신 총재는 취임사에서 현 상황에 대해 “중동전쟁 이후 국제유가 상승으로 물가 상방압력과 경기 하방압력이 동시에 증대됐다”며 통화정책·금융안정·화폐 신뢰·경제 구조개혁 등의 과제를 제시했다.
지난 1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선제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신 총재는 “중동 리스크 영향이 근원물가나 기대 인플레이션으로 전이돼 2차 파급효과가 나타나면 통화정책을 써야한다”며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놓기도 했다. 이창용 전 총재 체제의 7연속 금리 동결에 대해서는 전략적 인내라고 평가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기조 전환이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가계부채 문제도 핵심 과제로 꼽았다. 신 총재는 “가계부채 GDP 대비 80~85% 이상 머무를 경우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단계로, 통화정책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고 거시건전성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현재 한국의 가계부채 비율은 88.6%로, 언급한 기준치를 이미 넘어선 수준이다. 이에 시장에서는 신 총재 체제에서 금리 인하 속도가 이전보다 보수적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연세대 경제학부 김정식 명예교수는 “신현송 총재는 글로벌 금융 사이클 이론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가지고 있는데, 해당 이론에서는 금융 안정을 굉장히 중요시하기 때문에 금리를 인상할 수도 있다”며 “이뿐만 아니라 현재 금리를 7차례 동결 중인데, 금리를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인상할 여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뿐만 아니라 외환시장 24시간 개장 추진, 역외 원화결제 시스템 구축, CBDC(프로젝트 한강 2단계) 가동 등 구체적인 정책 방향도 내놨다. 신 총재는 원·달러 환율 수준을 직접 억제하기보다 장기적으로 원화 국제화를 통해 구조적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입장이다.
전세계 잠식한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케빈 워시 후보와 신현송 총재가 맞닥뜨린 상황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중동전쟁 장기화로 에너지 가격이 오르며 공급발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동시에,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는 스태그플레이션 압력이다. 금리를 올리면 경기 하방 압력이, 내리면 물가 부담이 커지는 딜레마다.
미국 연준의 베이지북 3월판은 미국이 순수출국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여파로 스태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국은행이 지난 23일 발표한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이번달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전월(107)보다 7.8포인트 하락해 99.2 수준을 나타냈다. 12·3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한 지난 2024년 12월(-12.7포인트) 이후 최대 감소폭이다.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는 등 에너지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국내외 경기 불확실성이 확대되자 소비자심리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중동전쟁 리스크를 반영해 지난 3월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2.1%에서 1.7%로 하향 조정했고,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2.7%로 상향하며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
한성대 경제학과 김상봉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이후로 성장률이 2년 평균 2%를 넘은 적이 없다”며 “물가 상승률은 2%라고 하지만 체감 물가는 그보다 훨씬 높은 상황으로 이미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물가가 너무 높은 상황이기 때문에 내수 경제가 개선되지 않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다만 숙명여대 경제학부 신세돈 교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경우 최소 2년에서 3년 정도는 지속돼야 하는데 유가가 안정되면 바로 상황이 개선될 것으로 본다”며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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