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주도·식민주의 반대…주변국에도 큰 영향
의문의 항공기 추락사고로 53세 사망…남아공 정부 연루 의혹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나확진 특파원 = 1986년 10월19일 모잠비크로 향하던 소련제 투폴레프 TU-134A 항공기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동부 모잠비크 접경 산악지대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잠비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한 뒤 귀국하던 사모라 마셸 당시 모잠비크 대통령과 수행원 등 34명이 사망하며 아프리카 전역에 큰 충격을 안겼다.
마셸 대통령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에서 10여년간 독립운동을 이끈 카리스마적 지도자이자 20세기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주변국에도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사망에 남아공 정부가 관련됐을 것이란 보도가 나오자 모잠비크 인근 국가인 짐바브웨에서도 수천 명의 시위대가 남아공·미국·서독 대사관 등에 돌을 던지고 국기를 찢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마셸 대통령은 1933년 9월29일 모잠비크 남부 가자 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수도인 마푸투에서 의료보조원으로 일하던 그는 1961년 독립운동가인 에두아르두 몬들라네를 만나 포르투갈에 대한 독립 투쟁에 나섰다.
1969년 몬들라네가 피살된 후 마셸은 무장독립투쟁의 구심점인 모잠비크해방전선(FRELIMO)의 위원장이 됐다. 마침내 1975년 6월 독립을 쟁취한 후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모잠비크의 식민지 해방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이끌었던 그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음과 동시에 권위주의 통치와 내전으로 비판받은 논쟁적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며 국유화 등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추구했다. 하지만 모잠비크가 경제난에 봉착하면서 이를 타개하고자 기업의 개인 소유를 허용하는 등 실용주의를 결합했다.
옛소련·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1985년 미국을 방문하는 등 서방에도 손을 내밀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흑인 분리·차별 정책)에 맞섰지만, 1984년 남아공의 백인 정부와 불가침 조약도 체결했다.
하지만 그는 일평생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종식을 추구했다. 국가적·지역적·대륙적 단결을 강조했으며 부족주의로 인한 국민 분열을 반대했다.
짐바브웨 국영 일간지 헤럴드는 2022년 10월 마셸의 36주기 즈음에 게재한 '사모라 마셸의 기억은 잊혀서는 안 된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가 1980년대 초 짐바브웨를 국빈 방문했을 때 했던 연설을 되새겼다.
"국가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짐바브웨에 쇼나족도, 은데벨레족도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짐바브웨 국민만 있어야 한다. 일부는 부족주의를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우리는 부족주의자들을 적의 반동적 대리인으로 규정한다."
2010년대 마셸 대통령 기념 강연에서 모잠비크 종교 지도자 루카스 아모세 목사는 마셸이 모잠비크인에게 해방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 대중적 해방운동의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많은 이에게 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투쟁에 참여하도록 영감을 줬다"고 기렸다.
특히 마셸의 구호 '알루타 콘티누아'('투쟁은 계속된다'는 포르투갈어)가 그를 남부 아프리카를 넘어 세계에 자유를 외친 지도자로 알리게 했다고 말했다.
해당 구호는 몬들라네가 처음 사용해 모잠비크해방전선의 슬로건이 됐다. 하지만 마셸은 독립운동 시기뿐 아니라 대통령이 되고서도 사실상 모잠비크의 국가적 구호처럼 계속 사용해 대중화시켰다.
아프리카인 최초로 미국 그래미상을 받은 남아공의 가수이자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가인 미리엄 마케바는 이 구호를 제목으로 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마셸이 국민국가 건설을 강조하면서 정치적 불관용으로 이어졌고,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일부 부족을 소외시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러 반대 지도자에 대해서는 수감, 처형 등으로 가혹하게 탄압했다.
또 독립 직후인 1977년 시작된 모잠비크민족저항운동(RENAMO)과 내전을 생전에 해결하지 못했다. 15년간 지속된 내전은 그의 사후인 1992년 유엔 중재 평화협상 타결로 종료됐다.
마셸의 사후 모잠비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폐기하고 복수 정당제와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새 헌법을 채택했다.
마셸을 53세에 숨지게 한 비행기 추락사고는 애초 남아공 당국이 주도한 사고 조사에서 항공기 조종사가 추락 지역을 공항 지역으로 착각한 것이 원인이라는 식으로 결론 났다. 하지만 당시 남아공 백인 정부가 개입했을 수 있다는 의혹이 거듭 제기됐다.
이에 남아공에서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몇차례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사고 당시 공항관제소 신호보다 훨씬 강력한 항공기 유인 신호가 있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 경위와 관련된 뚜렷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은 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한편 마셸 대통령의 부인 그라사 마셸 여사는 남편 사후 12년 뒤인 1998년 만델라 당시 남아공 대통령과 재혼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2개 국가에서 영부인을 지낸 마셸 여사는 재혼 후에도 마셸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사망 원인을 규명하려는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ra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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