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에서 포도농사를 짓는 청년농부 오원석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다급하다.
"대표님. 포도꽃이 벌써 피었어요. 다른 농장은 벌써 수정을 하고 있어요."
전화를 받은 것이 4월 초였으니 예년보다 일찍 핀 것이다. 포도꽃이 피는 순간 수정 작업을 해줘야 포도가 맺히고 수확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다급할 수밖에 없다.
포도꽃은 매우 볼품없다. 작고 하얀 꽃이 이내 화관을 벗어던지고 초록 알갱이로 변한다. 그 알갱이 하나하나가 나중에 포도알이 된다. 화려하지 않아도 제 역할을 다하는 꽃이다. 격려의 말을 건넸는데 돌아온 답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이게 잘 안 팔려요. 샤인머스캣은 이제 명품이 아니에요."
그가 포도 시장을 설명했다. 샤인머스캣이 인기를 끌자 전국 포도 농가의 40% 이상이 품종을 바꿨다. 과잉 생산이 뒤따랐다. 유통업자들은 포전 거래로 미리 계약을 맺고 포도가 채 익기도 전에 거두어 시장에 쏟아냈다.
미성숙한 과실이 홍수처럼 풀리자 가격은 폭락하고 맛도 떨어졌다. 브랜드 이미지는 바닥을 쳤다. 모든 포도 품종 중에 가장 가격이 낮은 품종이 샤인 머스캣이라고 지난 봄 실제로 뉴스에 나왔다. 수확 3년 차인 오 대표는 품종 전환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포도는 덩굴 식물이다. 겨울에 전정 작업을 하고 늦은 봄에 꽃이 피어 수정한다. 여름에는 과실이 비대해지고 색이 변하며 당도가 오른다. 가을 무렵 당도가 최고조에 오를 때 수확한다. 씨앗보다는 삽목과 접목으로 증식하며 하우스 한 동 전체가 포도 한 그루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그물처럼 뻗은 가지에 수천 송이가 달린 풍경은 경이롭다.
제대로 된 수확까지는 2~5년 이상이 걸린다. 생산의 시차가 길고 기후 변화와 병충해에 민감해 불확실성도 크다. 포도나무의 경제적 수명은 20~30년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50~100년 이상 산다. 50년 이상 된 포도나무로 만든 '올드 바인' 와인은 생산량이 적어도 풍미가 깊어 고가에 거래된다. 오래될수록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될수록 깊어지는 것이다.
보몰의 비용 질병과 필수의료의 결함
샤인머스캣 시장이 무너지자 정부가 나섰다. 품질 인증제, 가공용 수매 지원, 품종 전환 지원, 해외 수출 개척 등의 대책이다. 포도 품종의 생존 여부는 결국 시장이 결정하지만 시장이 혼자 감당하지 못할 때 국가가 개입하는 구조다. 캠벨얼리가 지배하던 시장이 거봉으로, 다시 샤인머스캣으로 옮겨간 것처럼 앞으로도 시장은 계속 흔들릴 것이다.
육성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고, 소비자의 선호에 민감하며,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한 존재. 이게 포도 생태계이다.
우리는 포도를 생과로 즐기고 포도주로 마신다. 과일로서 포도는 대체재가 있지만 와인은 다르다. 와인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국가가 나서서 지켜야 할 가치재는 아니지만 없으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다. 주당들에게는 없으면 몹시 불편하고 상실감을 주는 필수적 기호재다.
포도와 비슷한 업계가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떠 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의료다. 물론 와인 없이는 아쉬운 대로 살 수는 있지만 의료 없이는 진짜 못 산다. 의료는 가치재이다.
포도와 의료는 평행 이론처럼 닮았다. 의사 한 명을 키우는 데 최소 10년이 넘는다.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서 수련을 거쳐 경험이 쌓이면 개원한다. 병원은 1차, 2차, 3차로 나뉘며 서로 촘촘한 네트워크를 이룬다. 포도나무의 뿌리와 가지처럼.
개인적으로 의사라는 직업이 부러운 것은 딱 하나다. 오래된 의사일수록 존경받는 것이다. 대부분의 업종과 직업이 나이가 들면 퇴출 대상이 되어 서러운데 의사만큼은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인정받고 존경받는다. 오래된 올드 바인 와인처럼 말이다.
의료는 민간 병원이 운영하지만 사실상 국가 보험 체계 안에서 움직이는 준공공재다. 시장 원리대로라면 수요가 많은 곳에 병원이 생기고 가격도 자율로 정해져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모든 국민의 평등한 진료를 위해 의료 수가를 엄격히 통제한다.
여기서 경제학의 보몰의 비용 질병 이론을 떠올려본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현악 4중주를 연주하려면 네 명이 똑같은 시간을 써야 한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는 시간도, 농부가 포도송이를 봉지에 싸는 손길도 마찬가지다. 기계화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제조업과 달리,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서비스는 생산성이 그대로인데 비용만 오른다. 의료비가 구조적으로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한국은 공익을 위해 건강보험으로 그 비용을 오랫동안 눌러왔다. 실질 비용과 수가 사이의 괴리는 그렇게 조용히 쌓였다.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 결과 지금 의료 시장은 샤인머스캣처럼 돈 되는 과목으로 쏠리고 있다. 소아과, 산부인과, 정형외과보다 성형외과와 피부과, 통증의학과가 늘고 지방보다 대도시에 병의원이 집중된다. 샤인머스캣이 그랬듯, 지금 방치하면 필수 의료도 어느 날 갑자기 시장에서 외면받을 수 있다.
이를 확인하고 싶어 바로척척의원 이세라 원장을 만났다. 그는 대한외과의사회 명예회장이다. 그에게 현재의 의료계 상황에 대하여 물었다.
그는 의료 시스템의 현실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성 발톱 수술을 예로 들었다. 시골 주민이 내성 발톱 하나 수술하려면 서울까지 올라와야 한다. 가까운 동네 피부관리실에서 교정 장치를 붙이다 증세가 심해진 뒤에야 병원을 찾는다.
건강보험으로 수술하면 본인 부담금이 2만원이 채 안 된다. 피부관리실 교정 장치는 1회에 5만원이 넘고 재발도 잦다. 수술이 훨씬 경제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인데 정작 수술할 병원이 없어서 문제란다. 의료 공백은 왜 생길까.
그가 이어서 설명했다. 낮은 의료 행위료 때문에 내성 발톱 수술을 할수록 병원은 적자다. 외과 의사가 수술만 하면 거의 모든 병원이 적자를 면치 못한다. 필수 진료과가 사라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과잉 생산된 샤인머스캣이 왜곡된 유통 구조로 농가를 벼랑 끝으로 몰았듯, 잘못 설계된 수가 구조와 소송 리스크가 필수 의료를 기피과로 만들었다. 특히 수술 분야가 심하다.
의료개혁이 제대로 된다면 적정수의 의대 증원은 반대할 이유도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유튜브에서 ‘이사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다른 의사들이 하지 않으려는 각종 외과적 수술을 한다. 그러면서 지방에서 멀리 서울까지 환자들이 찾아오는 현상을 안타까워한다. 먼거리를 이동하면서 발생하는 교통비와 시간의 소모는 의료 비용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국민들의 손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답을 들으니 사정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나는 그저 의사들을 집단 이기주의자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최근 몇 년간 병원에서 만난 의사들은 환자 진료에 진심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노인들이 많은데 그 노인들에게 끝까지 경청하며 친절히 설명하는 모습에 감탄한 기억이 적지 않다. 인기있는 직업인 의사들도 그들의 속사정이 다르다. 샤인머스캣 농부의 고충처럼 말이다.
샤인머스캣 사태나 의료 사태나 나로서는 해법을 제시할 입장이 아니다. 다만 이것만큼은 안다. 농부는 오늘도 맛 좋은 포도를 키우려 애쓰고, 의사는 오늘도 환자를 고치려 애쓴다. 그 마음은 같다. 오늘 저녁은 올드 바인 한 잔 마셔야겠다. 오래될수록 깊어지는 것들을 위하여.
☞보몰의 비용 질병=생산성 향상이 어려운 서비스 부문의 비용이 다른 부문의 임금 상승에 맞춰 함께 오르면서 전체적인 비용이 급증하는 현상이다. 경제학자 윌리엄 보몰이 제시했으며 의료나 교육처럼 사람의 노동력이 필수적인 분야에서 주로 발생한다.
여성경제신문 김성주 슬로우빌리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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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슬로우빌리지 대표
한양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관광과 엔터테인먼트를 전공했다. 삼성에버랜드에서 오랫동안 '환상의 나라'를 설계하며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현재는 슬로우빌리지 대표이자 컨설턴트로 변신해 농촌에 행복의 마법을 부리는 중이다. 한국수달보호협회 수도권서부지회장으로서 생태 보호에 앞장서고 있으며, 한국사회적농업협회 부회장을 맡아 치유농업과 6차산업을 이끌고 있다. 사람과 생명이 함께 웃고, 모든 이가 즐거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쾌한 사명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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