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는 전동차 계약이 체결됐고, 서울에서는 원전 인허가 절차를 앞당기는 법이 통과됐다. 한국은 이제 차량만 따로 파는 것이 아니라, 철도 운영 시스템·전력 공급·금융 구조까지 함께 설계해 하나의 사업으로 묶어 진출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23일(현지시간) 현대로템은 베트남 타코(THACO) 그룹과 호치민 메트로 2호선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규모는 약 4910억원이다. 현대로템이 베트남 철도 시장에 처음으로 진입한 사례다. 이번 계약에는 무인 전동차 공급이 포함됐다. 동시에 타코 그룹과 신호 시스템 공급 업무협약(MOU)도 함께 체결했다.
차량만 납품하는 것이 아니라, 열차를 제어하고 운행을 관리하는 시스템까지 함께 들어가는 구조다. 이 차이는 명확하다. 차량은 납품으로 끝나지만, 신호·제어 시스템은 유지보수, 성능 개선, 추가 공급으로 이어진다. 한 번의 계약이 아니라 장기간 운영과 후속 사업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호치민 메트로 2호선은 2030년 개통을 목표로 추진 중인 베트남의 핵심 도시 인프라 사업이다. 총연장 64㎞에 36개 역사가 들어설 예정이며, 지난 1월 착공돼 3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구축된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번 사업이 차량 조달을 넘어 베트남의 도시 운영 구조를 바꾸는 프로젝트라는 점이다.
대도시 교통망은 한번 구축되면 수십 년간 시민의 이동 패턴과 도시 팽창 방향, 상권과 주거지의 가치 흐름까지 바꾼다. 그런 점에서 철도 수주는 제조업 계약을 넘어 도시의 시간표를 설계하는 일에 가깝다.
이번 수주에서 핵심은 현지화다. 현대로템은 타코 그룹과 협력해 베트남에 구축될 철도차량 공장에서 차량 일부를 생산할 계획이다. 이는 베트남 정부가 추진하는 자국 철도산업 육성 정책과 맞닿아 있다. 상대국 정책과 충돌하지 않고 그 틀 안으로 들어가 발주처의 신뢰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동시에 국내 500여 개 협력사가 함께 움직인다. 한 기업의 수주에 그치지 않고 부품, 제어, 전장, 유지보수까지 산업 생태계 전반이 동반 진출하는 구조다. 결과적으로 이번 사업은 개별 기업 실적을 넘어 국내 철도산업의 외연을 해외로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핵심은 이 사업이 철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수출입은행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한국무역보험공사, 한국전력공사, PVN과 ‘베트남 원전 프로젝트 금융 협력 가능성 검토’ 4자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협력의 의미는 분명하다. 향후 원전 사업의 자금 구조를 누가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선점이다. 대형 인프라는 기술만으로 따낼 수 없다. 자금 조달 방식, 장기 수익 회수 구조, 리스크 분담 체계까지 함께 설계해야 사업이 성립한다.
철도와 원전은 분야는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초기 투자 규모가 크고, 운영 기간이 길며, 수익은 장기간에 걸쳐 회수된다. 이 때문에 수주 경쟁의 기준도 달라진다. 기술이나 가격이 아니라, 금융 구조를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가 결과를 좌우한다.
이 지점에서 현대로템의 베트남 철도 진출과 수은의 원전 금융 MOU는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한국이 베트남에 제공하는 것은 전동차나 발전 설비에 그치지 않는다. 교통 인프라와 전력 인프라, 이를 뒷받침하는 금융 구조와 제도적 신뢰까지 함께 들어간다. 도시를 움직일 교통망과 산업을 유지할 전력,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자금을 하나로 묶는 방식이다. 결국 수출의 단위가 설비에서 시스템으로, 나아가 운영 구조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같은 날 국회에서는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차세대 원자로를 대상으로, 본격 인허가 이전 단계부터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사전검토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원자력안전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핵심은 절차가 아니라 시간이다. 기존 규제 체계는 대형 원전을 기준으로 설계돼 있어, 설계 유형이 다양하고 개발 속도가 빠른 SMR에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건설허가나 표준설계 인가를 신청한 이후에야 심사가 시작되는 구조에서는 초기 설계 단계부터 규제 리스크를 안고 개발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이 구조는 비용을 키우고 상용화 시점을 늦춘다. 결과적으로 기술 경쟁력이 아니라 ‘시간’에서 밀리게 된다. 이번 개정안은 그 지연을 앞단에서 줄이겠다는 조치다.
SMR은 연구 단계에 머무는 기술이 아니다. AI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고, 데이터센터·반도체 공정·첨단 제조업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전제로 돌아간다. 재생에너지는 간헐성과 계통 안정성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고, 대형 원전은 입지·건설 기간·주민 수용성에서 제약이 크다.
이 조건에서 SMR이 대안으로 떠오른다. 용량을 나눠 설치할 수 있고, 모듈형 설계로 건설 기간을 줄일 수 있으며, 산업단지나 데이터센터 인근에 배치할 수 있다. 전력 수요가 발생하는 지점에 맞춰 단계적으로 증설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번 법안의 의미는 규제 완화가 아니라 시간 단축에 있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안전성 검토를 가능하게 해 개발과 인허가 사이의 지연을 줄였다. 차세대 전력 시장에서 경쟁은 기술이 아니라 ‘상용화 시점’에서 갈린다는 점을 반영한 조치다.
베트남 철도 수주, 원전 금융 협력, SMR 패스트트랙 입법은 각각 따로 놓고 볼 사안이 아니다. 하나는 베트남에 철도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위에서 작동할 전력 인프라에 금융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며, 또 하나는 그 전력 기술의 상용화 시점을 국내에서 앞당기는 조치다.
선로와 전력, 자금과 제도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면 경쟁 기준도 달라진다. 기업 단위의 제품 성능이 아니라, 교통과 에너지, 금융을 하나의 구조로 설계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지금 베트남에서 나타나는 변화가 그 방향을 보여준다.
이번 흐름은 베트남 북남 고속철도 사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사업은 약 100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베트남 최대 인프라 프로젝트다. 한국이 호치민 메트로에서 차량과 신호 체계를 먼저 구축하고, 수은과 무보·한전이 에너지 프로젝트 금융 구조를 선점하며, 국내에서는 SMR 상용화 속도를 앞당기는 제도 정비까지 마치면 경쟁의 기준은 달라진다. 무엇을 납품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교통·전력·금융을 결합한 인프라 운영 구조를 누가 제시할 수 있는지가 승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인프라 사업의 승부는 제품 성능만으로 갈리지 않는다. 상대국의 정치·재정·산업 구조에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장기간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체계를 제시하는 쪽이 선택된다. 이번 베트남 사례에서 한국은 그 조건을 겨냥하고 있다. 철도는 현지 생산으로 진입하고, 원전은 금융 협력으로 기반을 만들며, SMR은 제도 정비로 상용화 시점을 앞당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계약과 MOU, 법안이지만, 실제로는 수출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
황정아 의원은 “AI 시대 SMR은 전력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라며 “또한 SMR은 우리나라가 글로벌 에너지 기술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법안 통과로 SMR 등 차세대 원자로 기술의 상용화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며 “이재명 정부가 대한민국 SMR 도약을 위해 민관 역량을 총결집하고 있는 만큼, 국회에서도 이를 단단히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황기연 한국수출입은행 행장은 “이번 MOU는 수은의 금융 노하우가 베트남 원전 분야로 확장되는 중요한 출발점”이라며 “우리 기업이 베트남 원전 시장의 주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금융의 든든한 동반자’ 역할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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