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방어와 합의가 만능키?…아리셀 판결로 본 중처법의 허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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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펌방어와 합의가 만능키?…아리셀 판결로 본 중처법의 허점들

투데이신문 2026-04-23 17:44: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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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박순관 대표(가운데)와 아리셀 박중언 총괄본부장(왼쪽). [사진제공=뉴시스]
화성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박순관 대표(가운데)와 아리셀 박중언 총괄본부장(왼쪽). [사진제공=뉴시스]

【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 항소심에서 경영진 형량이 대폭 감형되면서, 사건 초기부터 대형 로펌을 앞세워 법률 대응에 나서는 기업들의 행태와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의 실효성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23일 투데이신문 취재에 따르면 수원고법 형사1부는 중처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아리셀 박순관 대표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한 1심을 파기하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박 대표의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에 대해서도 1심 징역 15년에서 징역 7년으로 형량을 낮췄다.

재판부는 유족 전원과의 합의와 피해 회복 노력을 주요 감형 사유로 밝혔다. 특히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전면적으로 방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봤고, 아리셀 측에서 일부 안전조치나 대응 노력이 있었던 점도 형량 판단에 고려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리셀 참사는 2024년 6월 경기도 화성시 소재 일차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근로자 23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대형 산업재해다. 중처법 시행 이후 단일 사업장 사고로는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례로 꼽힌다.

아리셀 측은 사고 직후 A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인단을 선임해 수사와 재판에 대응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법률사무소는 국내 최대 규모의 로펌 중 하나로 대기업·대형 사건을 중심으로 법률 자문과 소송을 수행해 온 곳이다. 업계에서는 로펌 선임 비용이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사 내용과 직접 관계 없는 자료 사진.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기사 내용과 직접 관계 없는 자료 사진.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중처법 사건에서는 이처럼 초기부터 전문 변호인단을 꾸려 법리 다툼과 양형 자료를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피해 회복을 위한 합의를 병행하는 대응이 일반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일부 사건에서는 대형 로펌이 참여한 가운데 항소심을 거치며 형량이 감경되거나 실형이 집행유예로 바뀌는 등 결과가 달라진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중처법 ‘1호 사고’로 불린 삼표산업 채석장 붕괴 사건에서는 그룹 회장과 대표이사가 무죄를 선고받고 현장 실무 책임자 중심으로 책임이 인정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틀 만에 발생한 첫 적용 사례로 2022년 1월 경기 양주 삼표산업 채석장에서 작업자 3명이 천공기 2대와 굴착기 1대를 이용해 골재 채취 작업을 하던 중 토사가 무너지면서 모두 매몰돼 숨진 사고다. 

해당 사건에서도 A 법률사무소는 삼표산업 측 변호를 맡아 재판에 대응했으며 법원은 최고경영진에 대해서는 중처법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현장 실무 책임자들에게는 유죄를 인정했다. 중처법 시행 직후 발생한 상징적 사건에서도 처벌이 최고경영진이 아닌 현장 책임자 중심으로 귀결되면서 법의 실효성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다.

현직 B 노무사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대형 로펌은 인력 규모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 대응을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법조계 인맥이나 전관 네트워크 등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며 “이 같은 구조가 결합되면 사건 결과가 법리뿐 아니라 대응 역량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23일 아리셀 참사 유가족들이 경기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23일 아리셀 참사 유가족들이 경기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또 항소심 재판부가 유족 전원과의 합의와 피해 회복 노력을 주요 감형 사유로 반영한 점에 대해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다. 중대재해 사건에서 ‘합의’가 사실상 핵심 양형 요소로 작동하면 실제로는 합의가 피해자 보호가 아니라 형량 감경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B 노무사는 “형사재판에서 피해자와의 합의가 양형에 반영되는 것은 피해자가 별도의 민사소송을 하지 않더라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에 취지가 있다”면서 “처벌 수위가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신호가 있어야 기업이 비용을 들여서라도 예방 조치를 선택하게 된다. 이번 판결처럼 합의를 이유로 형량이 크게 낮아지면 기업에 ‘안전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고 이후 합의를 통해 형량을 줄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러한 흐름이 중처법의 설계와 운용 방식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보고 있다. 법안이 추상적으로 규정돼 있어 입증 과정에서 책임이 축소되기 쉽고 조직 전체의 안전관리 실패를 개인 형사책임으로 환원하는 구조 한계점이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정진우 교수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중처법 자체가 모호하고 엉성하게 짜여 있다 보니 판사마다 판단을 다르게 내릴 여지가 크다. 이 같은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중처법은 처벌만능주의에 입각하고 있는 법이지만 사실 처벌을 높여 안전보건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단 것은 상당히 안일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중처법으로 인해 의미없는 서류 작업이 늘고 중대재해는 줄어들지도 않았다. 또 로펌과 법률 컨설팅 기관에 돈이 가는 효과를 가져와 사회 자원 배분에 심각한 왜곡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며 “산업안전보건법에도 이미 안전보건 체계가 규정돼 있는 만큼 중처법을 이에 포함하고 변화가 필요하다면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 충돌과 혼란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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