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N 르포] 굿바이 힙지로…을지로의 ‘골든타임’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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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 르포] 굿바이 힙지로…을지로의 ‘골든타임’을 걷다

투데이신문 2026-04-23 13:46:5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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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3가역 일대 재개발 구역. 낡은 상가와 공사 가림벽이 마주보고 있다. ⓒ투데이신문
을지로 3가역 일대 재개발 구역. 낡은 상가와 공사 가림벽이 마주보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임규리 인턴기자】지하철 출구를 나서자 거대한 공사장 가림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벽을 따라 성인 두 명이 겨우 지나칠 법한 좁은 보행로가 나 있고 그 위로 시민들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풍경은 금세 달라졌다. 가림벽과 보행로 대신 빛바랜 원색 간판을 단 낮은 건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십 년의 역사와 재개발 사이를 넘나드는 이곳은 이른바 ‘힙지로’라 불리는 을지로의 현주소다.

을지로는 한국전쟁 이후 서울 도심 재건과 함께 형성된 골목이다. 폐허가 된 서울을 다시 세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을지로엔 목재·철물·인쇄 업체들이 자리를 잡았다. 1980년대엔 인쇄업체만 1500여곳이 밀집한 국내 최대 인쇄촌이 됐다. 수십 년간 도시의 성장을 뒷받침해 온 세월의 흔적 위로 카페와 술집들이 들어서 ‘힙지로’라는 새 별명을 얻기도 했다.

지금 을지로는 또 한 번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을지로3가역 일대에서 착공·공사 중인 도시정비형 재개발 사업만 3곳, 인가·심의까지 완료된 곳까지 합치면 6곳이 넘는다. 지난 3월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충무로 1~5구역까지 더하면 이 일대를 둘러싼 재개발 사업은 총 8개에 달한다. 가림벽 너머 을지로의 미래는 어디로 향할까. 투데이신문은 을지로 골목을 직접 걸으며 그 현장을 들여다봤다.

(왼쪽) 거리두기 해제 직후인 2022년 4월 젊은 층의 성지로 떠올랐던 노가리골목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오른쪽) 재개발 공사가 한창인 2026년 4월 16일의 같은 장소. 과거 제조업 노동자들의 쉼터에서 청년들의 ‘힙지로’로 변모했던 골목은 이제 적막감만 감돈다. ⓒ투데이신문
(왼쪽) 거리두기 해제 직후인 2022년 4월 젊은 층의 성지로 떠올랐던 노가리골목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오른쪽) 재개발 공사가 한창인 2026년 4월 16일의 같은 장소. 과거 제조업 노동자들의 쉼터에서 청년들의 ‘힙지로’로 변모했던 골목은 이제 적막감만 감돈다. ⓒ투데이신문

낭만과 재개발 사이, 상인들은 어디에

을지로3가역에서 청계천 방향으로 걷자 노가리골목이 나왔다. 골목에 들어서자 날카로운 드릴 소리와 트랙터 소리가 귀를 울렸다. 바닥에 새겨진 ‘서울미래유산 지정’ 표식은 공사장에서 날아온 먼지에 뒤덮여 알아보기 힘들었다.

노가리 골목에서 ‘에이스호프’를 운영하는 이모(63)씨는 실내에서도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가게 안까지 침투하는 공사 먼지 때문이다. 가게 곳곳의 벽면엔 거미줄 같은 금이 나 있었고 그 틈으로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테이블마다 붙은 ‘내게 노가리골목이란?’이 적힌 낡은 스티커 위로는 먼지가 뽀얗게 앉았다. 5년 전 골목의 가치를 기리며 붙인 문구였지만 지금 그 질문에 답해줄 이는 없는 듯했다.

이씨는 재개발 자체를 완강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변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걸 인정하는 눈치였다. 다만 그 과정에서 유무형의 피해가 상인에게 전가되는 상황을 짚었다. 그는 “재개발 과정에서 소음과 먼지를 견디는 건 상인들 몫”이라고 털어놨다.

이씨는 “무작정 막는 게 능사가 아니다”라며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행정의 경직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야외 테이블(야장) 규제’다. 중구청은 재개발 안전 문제로 야장을 금지했지만 골목 특유의 정취를 찾는 손님들의 요구와 상인의 생존권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야장 운영으로 쌓인 벌금이 아직도 쌓여있다”고 토로했다.

골목을 벗어나자 줄지어 선 회색 컨테이너들을 마주했다. 한때 “도면만 주면 탱크도 만든다”던 ‘공구상가’다. 번듯한 건물이 사라진 자리는 공사 가림벽이 대신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30년간 자리를 지켜왔다고 말한 공구상 사장 A씨는 “예전엔 이 일대가 다 맛집이었어. 닭도리탕, 생태찌개, 돼지갈비... 지금이야 사람들이 ‘힙지로’라며 찾아오지만 우리한테는 일 마치고 동료끼리 왁자지껄 회포 푸는 자리였지”라며 골목의 옛 풍경을 어제 일처럼 묘사했다.

추억을 회상하는 A씨의 시선은 공사 가림벽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그는 “재개발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당장은 먼지와 소음 때문에 가게 문을 닫고 살아야 한다”며 씁쓸함을 내비쳤다.

평일 낮 시간대의 을지로 인쇄골목. 인쇄물을 실은 오토바이 몇 대만 지날 뿐 한산한 모습이다. ⓒ투데이신문

“IMF·코로나도 버텼는데...” 동력 잃은 인쇄기의 소음

노가리 골목과 공구상가를 지나 아래로 내려오자 ‘인쇄골목’ 표지판이 나타났다. 골목 안으로 발을 들이자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빼곡이 들어선 인쇄소들을 볼 수 있었다. 한 인쇄소 안으로 들어서니 가정집 거실만 한 작은 공간에 천장까지 닿는 대형 인쇄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기계는 쉬지 않고 돌아갔지만 그 곁을 지키는 건 사장 한 명뿐이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낡은 인쇄판들은 이곳이 1980년대 을지로의 전성기 속에 멈춰 있음을 보여줬다.

경원인쇄 사장 박남수(70)씨는 “차라리 재개발됐으면 좋겠어. 이사 비용이라도 받게”라고 했다. 평생을 바친 일터지만 이제는 희망보다 체념이 앞선다. 박씨는 “40년간 명함부터 연하장, 은행 서류, 청첩장까지 안 만든 게 없는데 이제는 오후 4시면 주변 가게들이 전부 문을 닫는다”고 말했다. 그때가 되면 골목 전체가 조용해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인쇄소 대신 들어선 카페와 술집들을 바라보며 “인쇄골목은 이제 끝났다”고 읊조렸다.

41년간 인쇄업에 몸담은 진영광고 사장 목진성(70)씨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재개발 소문만 10년째야. 이젠 정말 나갈 준비를 해야지”라고 말했다. IMF와 팬데믹이라는 파도를 넘은 장인도 ‘시대의 변화’ 앞에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담담한 말투와 달리 그의 시선은 손때 묻은 인쇄판 위에 한참을 머물렀다.

을지로3가역 9번 출구 안쪽 골목. 낡은 인쇄소와 감각적인 카페가 공존하며 ‘힙지로’라 불리는 이곳 또한 얼마 전 재개발이 확정됐다. ⓒ투데이신문

‘힙지로’는 어디로 가나

인쇄골목의 적막을 뒤로하고 조금 더 깊숙이 발을 들이자 공기가 바뀌었다. 기름 냄새 대신 고소한 원두 향이 풍겼고 낡은 벽돌 건물 위로 형형색색의 타이포그래피 간판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평상에 앉아 바둑을 두는 노인들 옆으로 이어폰을 낀 젊은이들이 지나갔다. 과거의 흔적 위로 현재의 기억이 머물며 묘한 활기를 만드는 이곳은 ‘힙지로’다. 하지만 지난 3월 이 일대마저 도시정비형 재개발 구역으로 공식 지정되며 골목의 유통기한이 지정되고 말았다.

영국에서 온 크리스(49)씨는 을지로의 매력을 ‘낮은 건물’에서 찾았다. 그는 “대형 호텔에서 머물고 있지만 이 거리의 정체성은 낮은 건물이 모인 골목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일본, 대만 등 다른 곳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이색적인 미학이 있다”고 말했다.

재개발 소식을 전하자 그는 “전부 허무는 건가요(All Knock Down)?”라 되물으며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K-콘텐츠를 통해 을지로를 접한 외국인들에게도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 이상이었다. 뉴진스의 뮤직비디오 배경이 된 ‘혜민당’을 찾았다고 말한 중국인 관광객 나나(26)씨는 “이곳이 한국의 근대 역사와 약학 문화를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며 “역사를 품은 공간이 재개발로 사라진다는 건 세계적으로도 안타까운 일”이라며 아쉬워했다. 

을지로의 감성을 사랑하는 국내 방문객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손현지(23)씨는 “청계천부터 이어지는 인쇄소 골목과 그 길 위에서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을지로 그 자체”라며 “현대와 과거가 섞인 이 모습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경기도에서 온 이시연(20)씨 일행 역시 “재개발이 되면 다시 올 이유가 없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혜민당 입구에 붙은 폐업 공고문. 문은 굳게 닫혔지만, 인근 공사 노동자들과 폐쇄 사실을 모르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계속해서 안으로 발을 들이고 있다. 맞은편엔 커피한약방이 있다.
혜민당 입구에 붙은 폐업 공고문. 문은 굳게 닫혔지만 인근 공사 노동자들과 폐쇄 사실을 모르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계속해서 안으로 발을 들이고 있다. 맞은편엔 커피한약방이 있다. ⓒ투데이신문

을지로, 다음 챕터 맞을 준비를

조선시대 서민 의료기관인 혜민서 터에 자리 잡았던 ‘혜민당’은 힙지로 열풍을 이끈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도시정비형 재개발의 파도를 피하지 못하고 올해 초 영업을 종료했다. 텅 빈 가게 앞에는 여전히 추억을 찾아온 발길들이 서성인다.

인근 커피한약방 직원 이재홍(38)씨는 “혜민당이 문을 닫은 줄 모르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폐쇄된 문 앞을 서성이는 모습을 자주 본다”며 “허준의 혜민서부터 이어져 온 이곳의 향수가 재개발 이후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되길 바란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서울시는 재개발 이후 을지로에서 퇴계로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개방형 녹지를 조성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낡은 건물들을 허문 자리에 시민을 위한 ‘도심 속 숲’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앞선 상인의 재개발 구역 소음공해 지적에 대해 서울시 중구청 관계자는 “소음·진동은 법적 기준에 맞춰 환경과에서 관리 중”이라고 밝혔다. 공사 피해 민원은 민간 시공사에 통보해 조치를 취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상인 이주 대책으로는 “수표구역에 공공임대산업시설을 마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수십 년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을지로가 상업지구나 녹지로 치환될 수 있을까.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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