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전시현 기자 | 서방 제재로 기존 국제 결제망 이용에 제약이 커진 러시아가 가상자산을 해외 무역 대금 결제에 우선 활용하는 방향으로 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러시아 안에서 상품·서비스 대금을 가상자산으로 치르는 행위는 계속 금지하되 국경을 넘는 수출입 정산에는 가상자산을 활용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겠다는 것이다. 가상자산을 일상 결제수단이 아니라, 제재 우회형 대외 결제 인프라로 먼저 쓰겠다는 판단으로 읽힌다.
▲ 7월 1일 목표지만…전면 허용과는 아직
다만 이를 가상자산 결제의 전면 허용으로 해석하기는 이르다. 러시아 재무부는 7월 1일을 목표로 거래소 규제와 허가 체계를 손질하고 있지만 실제 운용은 라이선스 부여와 감독 체계가 갖춰야 가능하다.
러시아 중앙은행 역시 관련 투자 법제가 올해 채택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첫 허가 사업자도 연말께나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러시아 모델은 자유화와는 거리가 멀다. 누구나 자유롭게 가상자산을 결제수단으로 쓰도록 푸는 방식이 아니라 국가가 정한 통로 안에서만 해외 결제를 허용하는 통제형 구조에 가깝다.
▲ 무역 결제 현실은 비트코인보다 '스테이블코인'
실제 결제 인프라 관점에서 더 주목받는 것은 비트코인보다 스테이블코인이다. 가격 변동성이 큰 비트코인은 무역 정산이나 기업 간 지급 수단으로 쓰기에 부담이 크다. 반면 달러 등에 가치가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은 상대적으로 변동성이 작아 기업 간 결제와 국경 간 송금에 더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같은 흐름은 다른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스위스 루가노시는 보다 현실적인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BBC에 따르면 이 도시에서는 약 350곳의 상점과 식당이 비트코인 결제를 받고 있으며 시청도 일부 공공 서비스 요금을 가상자산으로 수납하고 있다. 유아 보육료 같은 시 서비스까지 결제 범위에 포함됐다.
다만 교통·에너지 요금처럼 아직 적용되지 않은 영역도 적지 않아, 도시 전체가 가상자산 생활권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탄은 국가 차원에서 관광 결제에 가상자산을 접목했다. 부탄 관광당국과 디지털은행 DK뱅크, 바이낸스페이가 손잡고 관광객이 항공권과 비자 비용, 지속가능개발부담금, 호텔, 가이드, 문화유산 입장료는 물론 길가 상점 물품까지 가상자산으로 결제할 수 있도록 했다. 이미 100곳이 넘는 가맹점이 연결돼 있고 비트코인과 USDC를 포함한 100종 이상의 가상자산을 지원한다.
파나마시티와 미국 콜로라도주도 공공 수납 창구를 열었다. 파나마시티는 세금과 각종 수수료, 범칙금, 허가 수수료를 비트코인·이더리움·USDC·USDT로 낼 수 있도록 했고 은행이 이를 현장에서 달러로 환전해 시에 넘기는 구조를 택했다. 콜로라도주는 2022년부터 주세를 가상자산으로 낼 수 있게 했지만 결제 즉시 달러로 전환하는 방식을 도입해 정부가 가격 변동 위험을 지지 않도록 했다.
▲ 정부보다 빠른 민간…스테이블코인, ‘보이지 않는 결제망’으로
민간 부문에서는 정부보다 더 빠른 변화가 감지된다. 미국 최대 배달 앱 도어대시는 스트라이프가 만든 블록체인 ‘템포’를 활용해 배달기사와 가맹점, 이용자 정산에 스테이블코인을 접목하기로 했다.
적용 대상 국가는 40개국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용자가 직접 코인 지갑을 다루지 않더라도, 뒤편의 정산 레일만 블록체인 기반으로 바꿔 지급 속도를 높이고 국경 간 비용을 낮추겠다는 구상이다. 스테이블코인이 더 이상 투기 자산에만 머무르지 않고 소비자가 체감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결제 인프라’로 스며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 22일 서울국제금융포럼에서도 비슷한 진단이 나왔다. 솝넨두 모한티 GFTN그룹 최고경영자는 기업 간 해외 결제는 지금도 2~5일이 걸리고 비용도 6% 안팎에 이르지만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연중무휴로 수초 안에 대금을 정산하고 수수료도 2% 수준까지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관련 입법으로 규칙을 정비하고 유럽과 일본도 제도적 틀을 갖추며 중국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플랫폼을 키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러시아는 제재를 우회하기 위한 ‘국경 밖 결제망’으로 가상자산을 활용하고 루가노·부탄·파나마시티·콜로라도 등은 생활 결제와 공공 납부의 보조 수단으로 시험하고 있다. 민간에서는 도어대시 같은 대형 플랫폼이 스테이블코인을 정산 인프라로 끌어들이고 있다. 같은 가상자산이라도 어디에 어떤 규칙 아래 쓰이느냐에 따라 성격은 전혀 달라진다는 뜻이다.
업계에서는 국내도 이제 “허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만 따질 단계는 지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역·송금·플랫폼 정산·공공 수납 가운데 무엇을 먼저 열지 또 그 책임과 통제를 누가 맡을지에 대한 현실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문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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