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역사학자 일라이자 필비의 '상속계급사회'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네 살, 여덟 살 어린 남매가 아파트와 연립주택 등 주택 25채를 사들였다. 한 성인은 아버지에게 무이자로 106억원을 빌려 130억원 서울 아파트를 샀다. 이들 사례는 정부가 적발한 '이상거래'지만, 정상적인 거래에도 '부모 찬스'는 흔하다. 지난해 서울 주택 매수에 들어간 증여·상속자금은 전년의 2배였고, 미성년자의 주택 구입은 해마다 수백 건씩 나온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니다.
영국 역사학자 겸 작가인 일라이자 필비는 지금의 사회에선 개인의 능력이나 성취보다 상속받은 가족의 부가 삶을 결정한다며, 이를 '상속주의'(inheritocracy) 사회라고 명명했다.
2024년 영국서 출간되고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책 '상속계급사회'에서 필비는 상속주의가 나타난 배경과 사회에 미친 영향, 그리고 상속주의가 어떻게 불평등을 고착화하는지 등을 짚는다.
책 속에서 상속주의를 한마디로 표현한 키워드는 '엄빠 은행'(Bank of Mum and Dad)이다. 저자는 "당신이 45세 미만이라면 당신 삶의 운과 기회가 점점 더 엄빠 은행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며 "엄빠 은행은 우리의 경제 시스템, 그중에서도 특히 부동산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든든한 엄빠 은행을 둔 사람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지도, 월세로 고민하지도 않는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누린 작은 사치들, 가령 더 자주 택시를 타고, 망설임 없이 외식을 하는 등의 작은 편의들이 쌓여 "더 효율적이고, 더 느긋하고, 더 성과가 큰 삶"으로 이어진다.
부모가 자식에서 부를 이전해주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뤄졌던 일이지만, 청년들이 상속에 크게 의존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 들어 생긴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지금의 청년 세대, 즉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생)와 Z세대(1997∼2010년생)의 부모인 베이비붐 세대(1942∼1965년생)는 교육과 개인의 능력이 보상으로 이어지는 '능력주의' 시대를 살았다. 이들은 경제 성장과 부동산 가격 상승 시기에 비교적 손쉽게 부를 축적했다.
부모 세대의 자산이 늘어날수록 '상속 예정 자산'도 늘어난다. 이 책에 따르면 향후 20년간 영국에선 5.5조 파운드(약 1경1천조원) 규모의 자산 이전이 예측된다. 자식 세대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산을 쌓긴 그만큼 더 어려워졌다. 계급 이동의 사다리는 끊어졌고, 상속을 통해서 일찌감치 계급이 결정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학력, 계급, 부가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하는 동질혼이 늘어나는 것도 상속경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면서 학력과 소득이 높은 밀레니얼이 또 다른 부유한 집안 출신의 학력과 소득이 높은 밀레니얼과 커플이 되어 그런 특권을 강화하고 두 집안의 엄빠 은행이 합병된다."(222쪽)
1981년생 밀레니얼 세대인 저자는 자신의 또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인터뷰해 상속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상속을 가족 간의 사적 문제로만 여기지 말고,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영국 저자의 책이지만, '수저 계급론'이 일찌감치 회자한 우리나라에 비춰봐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돌베개. 방진이 옮김. 362쪽.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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