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손성은 기자]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가 시장의 상수로 자리 잡으면서 금융권 자금 지형도가 급변하고 있다. 지난 2월 말 미국과 이란 간 무력 충돌 여파로 안전자산인 은행에 숨어들었던 자금이 최근 증시가 반등하자, 일제히 위험자산으로 이동하는 ‘머니무브’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실제 지표로 증명된다. 불과 15영업일 만에 시중은행 정기예금과 요구불예금에서 3조원이 넘는 자금이 빠져나갔다. 반면 증시 진입을 앞둔 대기성 자금인 투자자예탁금은 가파른 회복세를 보이며 자본시장 귀환을 알렸다.
◇보름 만에 3조 증발…정기·요구불예금 동반 이탈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우리·NH농협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의 21일 기준 정기예금 잔액은 755조4931억원으로 파악됐다. 이는 지난달 말(757조2452억원)과 비교해 1조7521억 원 줄어든 수치다.
입출금이 자유로워 언제든 투자에 투입할 수 있는 요구불예금의 감소세도 가파르다. 같은 기간 요구불예금 잔액은 534조9670억원을 기록하며 전월 말 대비 1조6151억원 감소했다. 두 상품군을 합산하면 불과 보름 남짓한 기간에 3조원 이상의 시중 자금이 은행 문을 나선 셈이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은행 예금 잔액은 통상 만기 도래 여부에 따라 변동하지만, 최근에는 금리 경쟁력 저하와 투자 시장 여건 변화가 자금 이탈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예금에 묶느니 주식”…인기 시들해진 은행 수신
은행권 수신 상품의 매력이 떨어진 배경에는 낮은 수익률이 자리한다. 현재 시중은행의 12개월 만기 정기예금 평균 금리는 연 2.93% 수준으로, 기준금리(2.50%)와 큰 차이가 없다.
특히 만기가 길수록 높은 금리를 보장하던 전통적 구조가 무너진 점이 결정타였다. 6개월 만기 예금 금리가 2~3년물 금리를 웃도는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고착화하면서, 장기 예금에 자금을 예치할 동기가 사라졌다. 여기에 작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증시 상승세가 더해지며 투자자들의 위험자산 선호 심리를 자극했다.
시중은행 다른 관계자는 “주식이나 ETF 등 단기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자산으로 자금이 쏠리고 있다”며 “장기 예치보다 유동성을 확보해 기회를 엿보려는 수요가 압도적”이라고 전했다.
◇전쟁 내성 생긴 시장…코스피 최고가에 예탁금 13조 ‘U턴’
금융권은 중동 정세 변화에 따른 자금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지난 2월 27일 전쟁 발발 직후 코스피가 5000선까지 급락하자 투자자들은 한때 안전자산으로 대거 대피했다. 실제 지난 3월 말 5대 은행의 요구불예금은 전월 대비 15조원 이상 폭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장이 전쟁 리스크를 충분히 반영했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코스피는 지난달 5052.46에서 저점을 형성한 뒤 이달 들어 강한 반등세를 보였고, 지난 21일에는 종가 기준 역대 최고치인 6388.47을 기록했다.
자금 흐름 역시 민감하게 반응했다. 금융투자협회 집계 결과 지난달 말 108조원까지 쪼그라들었던 투자자예탁금은 이달 20일 기준 121조원으로 급등했다. 약 한 달 만에 13조원에 달하는 ‘실탄’이 증시로 복귀했다.
시중은행 또 다른 관계자는 “증시 활황이 자금 흐름의 물길을 완전히 돌려놓을 가능성이 크다”며 “시장 내부의 전쟁 내성이 강해진 데다 증권사 종합금융투자계좌(IMA) 등 예금보다 높은 수익을 제공하는 대체 상품이 늘어난 만큼 은행권의 자금 이탈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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