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첼레트 "보편적 대화"·그로시 "행동하는 지도자" 강조
첫 여성 총장 나오나…중남미 순번론 속 비전 경쟁
(뉴욕=연합뉴스) 김연숙 특파원 =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도전장을 던진 4명의 후보가 21일(현지시간)부터 생중계 청문회에 참석한다.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는 이날부터 이틀간 회원국 대표들과 시민사회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후보당 3시간씩 질의응답이 진행된다.
21일엔 미첼 바첼레트(74) 칠레 전 대통령과 라파엘 그로시(65)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장이, 22일에는 레베카 그린스판(70) 코스타리카 전 부통령, 마키 살(64) 세네갈 전 대통령이 차례로 나선다.
◇ 검증대 오른 후보들…비전 경쟁 본격화
첫 주자는 미첼 바첼레트였다. 칠레에서 두차례 대통령을 역임했고, 2010∼2013년 유엔여성기구 초대 사무총장을 거쳐 2018∼2022년 유엔인권최고대표를 지냈다.
그는 출마 비전 성명에서 "협력은 평화와 존엄을 위한 인류의 가장 강력한 도구"라며 다자주의 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 공화당 일각에서는 그의 낙태 찬성 정책과, 인권최고대표 재임 시절 중국 신장 위구르 문제를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미국의 거부권 행사 요구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자국 우파 정부의 지지 철회까지 겹치는 등 부담이 커진 모습이다.
바첼레트 후보는 이날 청문회에서 "유엔은 지구상에서 크고 작은 모든 국가,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모든 국가가 다른 국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며 "보편적 대화"를 강조했다.
유엔 헌장에 기반한 다자주의, 분쟁 지역에서 현장 주둔의 필요성 등도 언급했다.
2분 단위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질문을 잊어버리거나 답변 내용이 끊기는 등 당황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오후에는 라파엘 그로시 후보가 나선다.
아르헨티나 출신 직업 외교관인 그는 IAEA 수장으로서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 자포리자 원전 시찰을 끌어내는 등 위기 대응 과정에서 '셔틀 외교' 능력을 보여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소 거침없는 발언으로 유명한 그는 "유엔은 존재 이유를 잃었다"며 '행동하는 지도자'를 자처한다. 여성 총장 필요성에 대한 요구에는 성별이 아닌 비전 중심 선출을 주장한다.
안보리 상임이사국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강점으로 꼽히며, 현재 외교가에서 가장 유력 후보로 꼽힌다. 실제 러시아는 전날 그로시 후보 지지를 시사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IAEA 수장으로서 그의 중립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22일에 나서는 레베카 그린스판 후보는 코스타리카 재무장관과 부통령을 거쳐 2021년부터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 흑해 곡물 수출 합의 중재에 관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을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금융 위기 대응 경험을 강조하며, 군대가 없는 소국 출신이라는 점이 오히려 중립적 중재자로서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선거 기간 이해충돌 논란을 피하기 위해 UNCTAD에 무급휴가를 냈다. 여전히 IAEA 직무를 유지하고 있는 그로시 후보와 대조를 이룬다.
마지막 주자인 마키 살 후보는 2024년까지 12년간 세네갈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아프리카의 부채 해결과 개발 지원 확대를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유엔 체제 경험이 없는 유일한 인물로, 오히려 이를 강점으로 내세워 "유엔의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현대화할 적임자"라고 강조하고 있다.
과거 아프리카연합(AU) 의장을 지냈으나, 이번 출마와 관련해 AU와 세네갈 정부의 공식 지지는 확보하지 못했다. 다만 부룬디 등 41개 아프리카 국가의 지지를 받고 있다.
◇ '방관자' 전락한 유엔…지상 과제는 유엔 재건
이번 선거는 유엔의 위상이 크게 실추된 시기에 치러진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후보자 4명은 13명이 경쟁했던 10년 전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국제사회의 극심한 분열과 유엔 위상 약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2015년만 해도 유엔은 파리 기후 협약을 체결하고 17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채택하는 등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굵직한 합의를 끌어냈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이란 등 주요 분쟁에서 안보리가 상임이사국 간 이해충돌로 사실상 마비되면서 국제 위기 대응에서 방관자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4명의 후보 모두 '혁신'과 '실행력'을 핵심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 첫 여성 수장 나올까…35년 만의 중남미 출신도 주목
1945년 유엔 창설 후 9명의 총장은 모두 남성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두 여성 후보가 '유리천장'을 깰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또 관례상 차기 총장은 1991년 이후 수장을 배출하지 못한 중남미 차례라는 관측이 나온다. 중남미 출신 3명이 포진한 이유도 이와 관련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최대 회원국 블록을 보유한 아프리카가 관례를 넘어선 '역할론'으로 도전장을 던지면서 지역 안배와 실무 역량 중 어떤 기준이 우선할지도 주요 변수다.
최종 선출은 사실상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등 5개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행사 여부에 달려있다.
미 보수 진영의 견제를 받는 바첼레트 후보와, 이란 핵 협상 등으로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 온 그로시 후보 등이 주요국 이해관계 조율에 대한 구상과 '중립성' 등을 어떻게 평가받을지가 당선의 핵심 요인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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