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경북 김천의 과하주는 샘물서 출발한 술이다. 남산동 과하천 물을 써 빚었다. 술 이름도 샘 이름을 따랐다. 김천과하주는 봄에 청주로 빚은 뒤 소주를 더하지 않고도 여름 뒤까지 맛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술이다. 빛은 맑은 황갈색에 가깝다. 찹쌀 곡주 향과 단맛, 산미가 같이 올라온다. 여산 호산춘, 한산 소곡주, 홍천 백주와 조선 4대 명주로 꼽혔다. 집 안에서만 빚어 마신 술도 아니었다. 궁중 공물에 올랐고, 귀한 손님을 맞는 자리에 놓였다. 일찍부터 대량 생산과 유통이 이뤄진 김천의 이름난 산품이었다.
◇금릉주천 물맛이 빚은 김천 명주
김천과하주는 과하천이 따라붙는다. 샘물은 금릉주천, 주천, 금지천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김천이라는 지명도 샘과 얽혀 생겼다는 말이 있다. 좋은 물이 있었고, 물맛이 술을 낳았다. 술의 명성이 고장 이름을 떠받친 구조다. 김천에서 과하주를 술 한 병으로만 다루지 않는 까닭이다. 과하천은 1990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8호로 지정됐다. 샘 안쪽 벽면에는 1882년 새긴 ‘금릉주천’ 글자가 남아 있다. 지금은 주변 주택 탓에 예전처럼 식수로 쓰지 못한다. 하지만 김천과하주를 설명하는 첫 문장은 아직도 샘에서 시작한다.
1718년 여이명이 쓴 '금릉승람'에서 드러난다. 김천 샘물로 술을 빚으면 향기와 맛이 빼어났다. 다른 고장 사람이 제법을 배워 가도 본고장 술맛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물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김천을 지나면서 샘물을 맛본 뒤 중국 금릉의 과하천 물맛과 같다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다만 김천역과 김천 지명 기록은 임진왜란보다 앞선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이여송 이야기는 술의 명성을 더한 후대 구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과하천은 오래전부터 김천 사람들 기억 한복판에 놓인 샘이었다.
김천과하주는 이름만 오래된 술이 아니다. '조선주조사'와 '주조독본'에도 김천산 과하주가 따로 적혀 있다. 13~14도대 고급 음료로 알려졌다. 제법은 찹쌀과 누룩을 같은 비율로 섞어 떡 모양 덩이를 만든 뒤 항아리 안에 넣어 밀봉 숙성한 뒤 정주를 떠내는 방식이다. 다른 지방 과하주가 청주에 소주를 섞어 여름 저장성을 높인다. 하지만 김천과하주는 과하천 물로 빚은 청주라는 점이 선명하다. 이름은 같아도 술의 계통은 같지 않다. 김천과하주를 따로 떼어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공물에서 상업주까지, 김천을 먹여 살린 술
김천과하주는 처음부터 시장성이 붙은 술이었다. 고급 곡물인 찹쌀이 주원료였다. 관청 통제 아래 진상품이나 사대부가 접빈용 술 성격이 짙었다. 몇몇 집에서 가양주로 빚기도 했다. 주요 공물로 매겨진 김천 과하주는 숙련된 주조 기술자 손을 거쳐 일정한 수요를 감당하는 술로 자랐다. 김천장이 서던 고장 환경과 교통 여건도 키웠다. 과하주가 ‘여름을 능히 넘기는 술’이라는 이름을 얻은 배경에는 이미 넓게 팔려 나가던 상업주 성격도 녹아 있다.
일제강점기 1926년 김천누룩조합이 세워졌다. 1928년에는 김천의 47개 주류 제조업체를 묶은 김천주조주식회사가 출범했다. 김천주조는 과하주, 막걸리, 약주, 소주를 함께 만들었다. 연간 생산량은 87만 리터를 웃돌았다. 단일 고장 기준으로 전국 최대급 규모였다. 당시 김천은 술 원료인 쌀 집산지였다. 철도와 도로가 맞물린 교통 요지이기도 했다. 김천과하주는 자체 판매망과 김천장의 도매점을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일본 수출도 이뤄졌다. 1931년 연 매출 10만 엔(약 90만 원) 기록도 있다. 김천과하주는 이 무렵 김천의 전략 상품이자 본격 상업주로 자리를 굳혔다.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40년대 들어 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해 쌀을 강하게 통제하면서 곡주 생산도 막혔다. 과하주도 그때 자취를 감췄다. 광복 뒤에도 식량 사정과 전쟁, 사회 혼란이 이어졌다. 술 빚는 사람들은 흩어졌다. 이름은 남았지만 실제 양조는 끊겼다. 한때 열차 안에서 병술을 팔 만큼 이름을 떨친 술이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난 시간이었다.
끊긴 술을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낸 사람은 고(故) 송재성 선생이었다. 치과의사이자 김천문화원장을 지낸 고(故) 송 선생은 과하주가 김천 특산물로 다시 불리기 시작한 1980년대 초부터 복원 작업에 매달렸다. 옛 주조 기술자 조무성과 함께 문헌을 뒤지고 기억을 모아 시험양조를 거듭한 끝에 1986년 재현에 성공했다. 이듬해인 1987년 김천과하주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됐다. 1991년에는 제조 면허도 받았다. 현재는 고(故) 송 선생의 차남 송강호 명인이 잇고 있다. 송강호 명인은 기능보유자로 전승과 생산을 맡았고, 1999년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17호가 됐다. 한 사람 손에서 복원이 시작돼 다음 세대 손에서 양조와 전승이 이어졌다.
◇인절미처럼 쳐서 빚고, 서늘한 곳서 오래 두는 술
김천과하주 제법은 손이 많이 간다. 찹쌀을 오래 불린 뒤 고두밥을 찌고, 황국화와 쑥, 볏짚을 깐 자리서 식힌다. 누룩가루는 과하천 물에 담가 맑은 누룩물만 받는다. 그다음 식힌 찹쌀밥에 누룩물을 조금씩 쳐 가며 떡메질을 한다. 밥알을 그대로 독 안에 넣는 게 아니라 인절미처럼 쳐서 술떡을 만든다. 이러한 공정이 김천과하주 제법의 첫 고비다. 이렇게 만든 술떡을 항아리 안에 담고 한지로 밀봉한 뒤 서늘한 양조실서 오래 둔다. 기록마다 기간은 조금씩 다르다. 40~45일 발효 뒤 16도 청주를 얻는 설명도 있고, 80~90일가량 길게 두는 전승 기록도 있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찹쌀과 누룩가루를 같은 양으로 쓰고, 술떡을 만들 때 물을 넣지 않는다. 15~18도 안팎의 서늘한 자리에 오래 두고 저온 발효와 숙성을 거친다는 점이다. 김천과하주는 빠르게 익혀 바로 내는 술이 아니다.
김천과하주는 밝고 투명한 황갈색을 띤다. 순 찹쌀곡주 향이 올라오고, 뒤에는 단맛과 산미가 붙는다. 목 넘김은 부드럽다. 손에 묻으면 끈기가 느껴질 만큼 농도가 있다. 시간이 갈수록 술맛이 익는 성질이 있다. 여름 뒤에도 맛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국향이 은근하게 따라오고, 끝에는 알싸한 산미가 남는다. ‘여름을 넘기는 술’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유가 병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김천과하주는 술 이름 하나로만 남은 고장이 아니다. 샘이 있었고, 그 물로 술을 빚었다. 술의 명성이 고장 이름과 같이 전해졌다. 한 차례 끊긴 뒤에도 다시 붙든 사람들이 있었다. 봄에 빚어 여름 뒤까지 두고 마신 청주라는 성격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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