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전쟁이 7주째 이어지면서 세계 경제 질서가 중대한 전환점에 놓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요국 간 정책 공조보다는 각국이 자국 경제 방어에 집중하는 '각자도생' 흐름이 짙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쟁 장기화로 에너지 가격과 환율 변동성이 커지는 가운데, 중앙은행들의 정책 대응 여력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21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 13일부터 19일까지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춘계회의에서는 지정학적 충격에 대한 각국의 우려가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은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 압력이 불가피하다는 점과 함께, 금리 정책만으로 이를 통제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공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로이터는 "참석자들은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발생하는 즉각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을 통화정책만으로 억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데 공감했다"고 보도했다.
실제 지난 2월 말 전쟁 발발 이후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글로벌 물가 안정 흐름은 다시 흔들리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어졌던 고물가 국면은 지난해 들어 다소 진정되며 주요국 금리 인하 기대를 키웠지만, 이번 중동 충돌이 다시 변수로 떠올랐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3월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3%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근원물가 상승률은 2.6%였다. 근원물가는 국제유가나 식료품 가격 등 외부 변수 영향을 크게 받는 품목을 제외한 지표다. 전체 물가 상승률이 근원물가를 크게 웃돌았다는 점은 에너지 가격 상승이 물가를 다시 끌어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중앙은행의 선택지가 좁아졌다는 점이다. 금리를 올리면 물가 대응에는 도움이 되지만 경기 둔화 부담이 커지고, 금리를 내리면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만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정책 딜레마'가 다시 심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중앙은행들이 2021년 인플레이션 판단 착오를 반복해 경기 침체를 자초할 수 있다는 경계감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변화는 국제 공조 체제 약화와 미국의 경제 리더십 후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양적완화(QE)를 통해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했고, 주요국 중앙은행들도 이에 보조를 맞추며 글로벌 공조 체제를 형성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도 미국은 달러 수요 급증에 대응해 기존 주요 5개국 외에 한국, 호주, 브라질, 멕시코 등과 한시적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며 '세계의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번 위기에서는 상황이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가 커지자 아랍에미리트(UAE) 등 일부 중동 국가들이 달러 유동성 지원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미국은 즉각적인 대응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 역시 전쟁에 따른 물가 상승 압력을 겪고 있는 데다, 금리 정책과 유동성 공급이 충돌할 수 있어 정책 선택 폭이 좁아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과거처럼 위기 때마다 달러를 공급하며 글로벌 금융시장의 방향타 역할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달러 공급이 제한되면서 주요국들은 외환보유액을 활용해 자국 통화 방어에 나서고 있다. 한국의 3월 외환보유액은 4236억6000만달러로 전월 대비 39억7000만달러 감소했다. 이는 11개월 만의 최대 감소 폭이다.
일본의 외환보유액도 같은 기간 359억6800만달러 줄었고, 인도 역시 2월 말 사상 최고치였던 약 7285억달러에서 400억달러 이상 감소해 3월 27일 기준 6881억달러 수준으로 내려왔다.
워싱턴 D.C. 소재 싱크탱크 아틀란틱카운슬의 조쉬 립스키 지정학경제센터 소장은 "미국이 더 이상 국제 질서의 지휘관 역할을 하지 않으며, 항상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각국이 체감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폴리뉴스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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