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카의 승부는 규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BOP가 경쟁의 조건을 만든다면 그 안에서 결과를 가르는 것은 ‘에너지 운용’이다. 하이퍼카 시대의 경쟁은 내연기관과 전기 모터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같은 조건에서도 에너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레이스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러한 구조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았다. 내구레이스는 2010년대 초반부터 에너지 효율 경쟁을 본격화했고, LMP1(르망 프로토타입1) 시대를 거치며 하이브리드 기술이 급격히 발전했다. LMP1은 르망 24시간을 중심으로 운영된 최고 클래스 프로토타입 카테고리다. 토요타와 아우디, 포르쉐는 이 시기 초고성능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경쟁적으로 개발하며 기술적 정점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경쟁의 기준도 바뀌었다. 단순한 출력 경쟁에서 벗어나 에너지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가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전기 모터와 에너지 회수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들의 시도는 ‘속도와 효율을 동시에 추구하는’ 레이스 개념을 정착시켰고, 하이퍼카 규정은 이 흐름 위에서 탄생했다.
WEC 하이퍼카는 LMH(르망 하이퍼카)와 LMDh(르망 데이토나 하이브리드) 두 가지 규정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구조는 다르지만 두 체계 모두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중심으로 성능을 구현한다. LMH는 제조사가 자체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고, LMDh는 표준화된 하이브리드를 사용한다. 두 방식 모두 BOP를 통해 출력과 에너지 사용을 균형 있게 관리한다.
이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절대 출력이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에너지를 쓰느냐다. 전기 모터는 가속 구간에서 강력한 토크를 제공하지만 사용 가능한 에너지는 제한적이다. 팀은 코너 탈출, 직선 가속, 추월 상황 등 특정 구간에 맞춰 에너지 사용을 정밀하게 배분한다.
하이퍼카는 회생 제동 시스템을 통해 에너지를 축적한다. 브레이킹 과정에서 발생하는 운동 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해 저장하는 구조다. 이때 전기는 외부에서 공급되지 않는다. 감속 과정 자체가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작동한다. 일부 시스템은 엔진과 연계된 발전 기능까지 활용해 회수 효율을 높인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회수하고 이를 어디에 투입하느냐가 랩타임을 결정짓는다. 이 과정은 단순한 기계 제어를 넘어선다. 실시간 데이터 분석과 드라이버의 운용 능력이 결합돼야 최적의 성능이 나온다.
레이스 전략에서도 에너지 관리는 핵심이다. 타이어와 연료 전략뿐 아니라 스틴트 전체에서 에너지 사용 패턴을 설계해야 한다. 특정 구간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이후 페이스 유지에 제약이 생긴다.
하이퍼카 레이스는 ‘출력 경쟁’이 아니라 ‘효율 경쟁’이다. 같은 조건에서도 더 적은 에너지로 더 빠른 랩을 만들어내는 팀이 우위를 점한다. 이러한 흐름은 현대 모터스포츠의 방향성과 맞닿아 있다. 속도뿐 아니라 효율과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구조다. 하이퍼카가 ‘기술의 시험장’으로 불리는 이유다.
내구레이스는 극한 조건에서 장시간 성능과 효율을 동시에 검증하는 환경이다. 제조사들은 이 과정에서 하이브리드 시스템, 에너지 회수 기술, 열 관리, 소프트웨어 제어 등 다양한 기술을 실제 주행 데이터로 축적한다.
이렇게 축적된 기술은 양산차로 옮겨간다. 토요타는 르망 하이브리드 시스템 경험을 바탕으로 전동화 기술을 발전시켜 왔고, 포르쉐는 919 하이브리드 프로그램에서 얻은 기술을 전기차와 고성능 모델 개발에 반영했다. 레이스에서 검증된 기술이 도로 위로 확장되는 구조가 완성된다. 이는 레이스가 단순한 경쟁을 넘어 미래 자동차 기술을 검증하는 실험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BOP가 경쟁의 틀을 만든다면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그 안에서 승부를 완성한다. 하이퍼카 시대의 레이스는 규정과 기술, 그리고 에너지 전략이 결합된 복합적인 경쟁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흐름’이 자리하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에너지 전략이 실제 레이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피트 전략과 드라이버 운용까지 포함한 실전 운영 방식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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