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학벌 지상주의'가 전례 없는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내년 수억 원대의 성과급 지급이 예상되는 SK하이닉스가 최근 채용에서 출신 대학 등 이른바 '간판'보다 실무 능력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거 명문대 졸업장이 취업 성공의 보증수표로 통하던 시대가 저물고 실제 직무 역량이 취업을 결정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생성형 인공지능(AI)의 확산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AI가 단순 지식 습득과 정보 전달 업무를 대체하면서 인재 평가의 척도가 '어디서 무엇을 배웠는가'에서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앞으로 대학 교육의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고도 전망했다. 단순한 학위 수여 기관을 넘어 AI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실용적 교육 중심으로 탈바꿈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학 간판이 밥 먹여주던 시대는 끝났다" AI가 뒤흔드는 대한민국 '성공 공식'
지난 13일 SK하이닉스가 발표한 채용공고가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모집 대상을 오는 7~8월 입사가 가능한 고등학교 또는 전문대학 졸업자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이번 채용 공고는 복지나 처우 수준이 국내 '톱 클래스'인 기업에서 학벌 기준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학벌 지상주의' 체제의 균열을 예고하는 '변화의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있다. 특히 올해 SK하이닉스가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구직자들의 관심도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증권가 시장 전망치인 영업이익 200조원을 달성할 경우 지난해 말 직원 수(3만4549명) 기준 내년 초 1인당 평균 성과급은 5억8000만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전문가들도 SK하이닉스의 채용공고를 계기로 직무 역량 중심의 채용 기조가 빠르게 확산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명문대 졸업=좋은 일자리'로 이어지던 공식의 균열은 이미 전 세계적인 대세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 경제 전문 매체 배런스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42%만이 대학 교육을 '매우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2013년 조사에서 미국 성인 중 68%가 '매우 중요하다'고 답한 것과 비교하면 10년 사이 26%p 감소했다. 막대한 사교육비와 등록금, 시간을 투자해 대학 '간판'을 확보하는 것에 대한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이 결정적 원인으로 지목됐다. 챗지피티와 제미나이 등 생성형 AI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지식의 습득과 활용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면서 전통적인 대학 교육의 영향력과 학벌의 위상이 빠르게 약화된 게 대학 교육 실효성 논란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육 수요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국가를 막론하고 현장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전문대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는 추세다. 통상 전문대학은 4년제 대학에 비해 교육의 깊이는 덜하지만 현장 맞춤형 기술 교육 면에서 강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한국전문대교육협의회에 따르면 올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전문대에 다시 입학한 학생 수는 2500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2021년(1769명) 대비 40% 넘게 증가한 수준이다.
4년제인 부산대학교 자연과학대를 자퇴한 뒤 전문대학인 한국폴리텍대학 부산캠퍼스 기계과에 입학 후 경남 창원의 두산에너빌리티 공장 생산직에 취업한 이민환 씨(29·남·가명)도 비슷한 케이스다. 그는 자신의 선택에 강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 씨는 "이론 중심의 4년제 대학과 달리 전문대는 현장 실습과 기업 연계형 교육을 통해 즉시 투입 가능한 실무 역량을 키울 수 있다"며 "취업난 속에서 실습 위주의 커리큘럼을 학습할 수 있다는 점이 최근 기업들의 채용 트렌드와 부합하는데다 실제 취업 결과도 나쁘지 않아 과거의 내 선택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 교육 현장에서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학벌'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최병호 고려대 휴먼 인스파이어드 AI연구원 교수는 "올해 초 LG그룹이 설립한 국내 최초 사내 대학원인 LG AI 대학원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적인 기존 대학들이 변화에 뒤처진 사이 기업들은 스스로 산업 현장과 연구가 긴밀히 연결되는 인재 양성 생태계를 직접 구축하기 시작했다"고 운을 뗐다.
이어 "대학이 수행하지 못하는 실무 교육을 산업 현장에서 직접 담당하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반드시 대학을 거쳐 취업에 성공해야한다는 고정관념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현재의 수능 시스템은 AI 시대의 변화 흐름과 전혀 맞지 않아 단순 주입식 교육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는 방식은 갈수록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입시 제도는 물론 대학 자체의 교육과정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공고했던 학벌 중심 사회 구조가 AI라는 거대한 기술적 파도와 기업들의 실리적 채용 트렌드를 만나 전례 없는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며 "지식 습득 기간이 크게 단축된 상황에서 대학이 과거의 전통적 학문에만 매몰돼 산업계의 요구를 외면한다면 그 존립 기반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대학이 인재 양성의 요람 역할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실무 중심의 교육 과정으로 신속하고 과감하게 전환해야 한다"며 "고학력 자체가 성공을 보장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고 대학 간판이 지녔던 변별력보다는 개별적 직무 역량이 인재 평가의 핵심 척도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Copyright ⓒ 르데스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