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전시현 기자 |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듯 디지털 달러가 국경과 블록체인의 벽을 넘어 자유롭게 오가는 시대가 열렸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이 서로 다른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하나로 잇는 'USDC 브릿지'를 본격 가동하며 디지털 달러의 이동성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서클이 이번에 출시한 USDC 브릿지를 통해 이더리움, 아비트럼, 베이스 등 17개 이상의 여러 네트워크에 흩어진 달러 유동성을 하나의 흐름처럼 연결하는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동안 개발자나 숙련된 이용자 중심이던 크로스체인 USDC 이동이 일반 사용자와 기업 서비스 차원으로까지 가까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존 자산 예치 방식 대신 '번앤민트(Burn & Mint·소각 후 발행)' 메커니즘을 적용해 보안 취약점은 보완하고 가스비(네트워크 수수료) 부담은 낮춘 것이 특징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로 국내 게임·핀테크·토큰증권(STO) 시장이 글로벌 유동성과 직접 맞닿는 통로가 한층 넓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국내 자산이 글로벌 블록체인 생태계로 진입하는 문턱이 낮아지면서 관련 산업의 외연 확장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서비스 개시는 지난주 방한한 제레미 알레어 서클 회장이 한국 시장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한 직후 이뤄진 실질적 조치라는 점에서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 달러 유동성, 체인 장벽 넘다
이번 서비스의 기반은 서클의 온체인 유틸리티(Cross-Chain Transfer Protocol, 이하 CCTP)다. CCTP는 출발 체인에서 USDC를 소각하고 도착 체인에서 같은 수량의 USDC를 다시 발행하는 1대1 번앤민트 구조를 쓴다. 기존 브리지가 자산을 중간 저장소나 유동성 풀에 예치한 뒤 다른 체인에서 래핑 토큰을 발행하는 방식에 의존해 왔다면 서클은 이 같은 중간 단계를 줄여 보다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전송 구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서클은 이를 통해 네이티브 USDC를 체인 간 1대1로 이동시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외부 중개 유동성이나 제3자 필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만큼 기존 브릿지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돼 온 복잡한 신뢰 구조와 유동성 분절 문제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센터장은 “서클의 USDC 브릿지는 단순한 기술 개선을 넘어 ‘유동성의 이동 방식’ 자체를 바꾸는 시도”라며 “속도와 비용, 신뢰라는 세 가지 난제를 동시에 푸는 해법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업계에 따르면 CCTP는 이더리움, 아비트럼, 베이스, OP 메인넷, 폴리곤 PoS, 아발란체, 솔라나, 세이, 유니체인, 리니아, 스타크넷, 월드체인, XDC 등 다수 체인을 지원한다. 다만 이번에 공개된 USDC 브릿지의 초기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EVM 호환 체인 중심으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클 관계자는 “17개 블록체인 자유 이동”이라고 단정하기보다 “이더리움·아비트럼·베이스 등 주요 체인 중심으로 USDC 이동이 간편해졌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전했다.
▲ ‘소각 후 재발행’… 브릿지 공식 바꿨다
이번 서비스의 핵심은 보안 구조의 변화다. 크로스체인 브릿지는 그간 가상자산 업계의 대표적 취약점이였다. 자산을 특정 금고나 풀에 묶어둔 뒤 다른 체인에서 래핑 자산을 발행하는 구조는 중간 저장소가 해킹 표적이 되기 쉬웠고, 실제 대규모 탈취 사고 상당수도 브릿지 취약점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반면 이번에 공개한 서클의 'USDC 브릿지'은 출발지에서 USDC를 소각하고 도착지에서 동일 수량을 다시 발행하는 번앤민트 방식을 앞세웠다. 중간에 자산이 머무는 구조를 최소화함으로써 기존 브릿지에서 문제로 지적돼 온 공격 표면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두고 “해킹 걱정이 사라졌다”고 받아들이기보다 기존 브릿지에 비해 보안 취약 지점을 줄이는 방향의 구조적 변화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편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안대학원 교수는 “번앤민트는 우리나라가 참고할 만한 유력한 표준 후보이지만 그 자체가 최종 해답은 아니다”라며 “안전한 인프라로 활용하려면 기술적 보안과 제도적 통제를 함께 설계한 뒤 단계적으로 적용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 해킹 표적 줄이고 전송 구조 단순화
속도 면에서도 이전보다 한층 개선됐다는 게 서클의 설명이다. 서클은 CCTP V2를 통해 이더리움과 이더리움 기반 레이어2에서 걸리던 크로스체인 USDC 전송 시간을 분 단위에서 초 단위로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 ‘후크’ 기능을 더하면 자금이 도착한 뒤 추가 동작을 자동으로 실행할 수 있어 단순 송금을 넘어 결제·교환·예치 같은 후속 처리도 한 번에 묶을 수 있다.
박성준 센터장은 이번 변화의 의미를 “속도 개선을 넘어 금융 인프라의 설계 방식이 바뀌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자산 이동에 드는 비용과 시간이 줄어들고 시장 간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는 실질적 이점이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자본이 해외 디파이(DeFi)·토큰증권 시장에 접근하거나 반대로 해외 달러 유동성이 국내 플랫폼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마찰 비용이 낮아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 수수료 낮추고 이용 문턱도 낮추다
이용자 편의성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다. 표준 전송(Standard Transfer)에는 프로토콜 수수료가 없고, 더 빠른 처리를 지원하는 신속 전송(Fast Transfer)에는 경로별 수수료가 붙을 수 있다. 개발자 문서상 신속 전송(Fast Transfer) 수수료는 출발 체인 기준 0~14bp 수준에서 형성될 수 있다.
외신에 따르면 USDC 브릿지는 이용자에게 수수료를 사전에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주고, 도착 체인 가스 처리도 자동화하는 사용자 경험을 제공한다. 다만 가스비가 없어졌다기보다 사용자가 각 체인별 가스 토큰을 일일이 준비해야 하는 부담을 줄인 서비스로 보는 편이 적합하다. 복잡한 코인 지식이 없는 일반 이용자도 보다 직관적으로 디지털 달러를 옮길 수 있는 환경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 서클 방한 뒤 속도전…한국 시장 정조준
한국 시장에서는 이번 움직임이 더욱 예민하게 읽힌다. 제레미 알레어 서클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방한해 두나무, 빗썸 등 주요 거래소와 KB·신한·하나금융 등 금융권 관계자들을 만나 국내 원화-디지털자산 전환 접점 확대와 발행·정산·온체인 거래 인프라 협력이 주요 의제로 거론됐다.
외신에 따르면 서클은 국내 주요 금융과 지난해 하반기 서클 민트를 활용한 개념검증(PoC)을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디지털 자산 관리 역량을 축적했다. 국내 주요 금융도 USDC 활용과 국경 간 거래,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가능성까지 폭넓게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를 두고 서클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발행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게 서클 측의 입장이다. DL뉴스에 따르면 제레미 알레어는 서울에서 서클이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내놓을 계획은 없는 대신 한국에서 제도적 길이 열리면 라이선스를 취득하고 현지 법인을 설립할 의향이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즉 서클의 한국 전략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발행하기보다는 국내 금융사·거래소와 손잡고 USDC 유통과 결제·정산 인프라 협력을 넓히겠다는 방향에 더 가깝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 게임·핀테크·STO…달러길 더 가까워졌다
국내 산업계가 주목하는 대목도 여기에 있다. 해외 이용자 비중이 높은 게임사나 글로벌 정산 수요가 큰 핀테크 기업 입장에서는 USDC를 결제·정산 수단으로 붙이기가 한결 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토큰증권(STO) 역시 앞으로 해외 투자자와의 접점을 넓히는 과정에서 자금 이동 효율성이 핵심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김상균 경희대 경영대학원(AI비즈니스 전공) 교수는 “이제껏 글로벌 유동성과 한국 자본 사이에는 여러 단계가 놓여 있었다”며 “USDC 브리지는 그런 단계를 치우는 공사에 가깝다”고 말했다. 다만 “우리 금융이 얻는 실질적 이득은 더 빨라진다기보다 더 얇아진다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덧붙였다. 자금이 움직이는 경로가 단순해지고 그만큼 시장 접근 비용이 낮아진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 기회 커졌지만 리스크도 더 빨라진다
문제는 연결성이 커질수록 기회와 위험이 함께 커진다는 점이다. 박성준 센터장은 “연결성 확대는 곧 자본 이동의 변동성 확대로도 이어질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리스크 관리 체계 정비가 기술 도입과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상균 교수도 비슷한 취지에서 “한국 자본이 세계의 기회에 올라타는 경로도, 반대로 외부 리스크가 들어오는 경로도 함께 얇아진다”며 “이는 곧 기회이자 위기”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달러 유동성과의 연결이 빨라질수록 외부 충격이 국내 시장에 전이되는 속도 역시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USDC 브리지 출시는 디지털 달러를 여러 체인 사이에서 하나의 자산처럼 이동시키려는 시도"라며 "글로벌 달러 유동성과 한국 디지털 자산 생태계의 연결이 실제 서비스 단계로 한층 가까워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국내 기업들로서는 해외 시장과 맞닿는 금융 인프라가 가까워졌다는 의미"라며 "정책 당국은 그만큼 더 정교한 규율 체계 정비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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