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의 우아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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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의 우아한 진화

노블레스 2026-04-20 10: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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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결혼식 사진. @queenvictoriasrevival
영국과 결혼했다고 표현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진주와 화려한 레이스 의상으로 순결함과 권위를 드러냈다. @solstissusa

한 뼘의 레이스를 위해 성 한 채 값을 지불하던 시절이 있었다. 16세기 유럽 왕실의 초상화 속 목을 뻣뻣하게 감싼 러프 칼라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을 엮어 만든 정교한 건축물이자 착용자의 지위를 증명하는 서늘한 권력의 상징이었다. 렘브란트나 다니엘 마이턴스 같은 17세기 화가들이 초상화 속 실 한 가닥까지 집요하게 묘사한 이유 역시 지위를 시각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레이스는 언제 발명된 것일까? 정확한 시기와 근원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레이스로 간주할 만한 직조 형태는 16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5세기 후반 끈을 단순하게 땋은 듯한 디테일의 의상이 회화로 남아 있는데, 이는 1561년 취리히에서 인쇄된 보빈 레이스 패턴 북 <누 모델부흐> 저자가 이탈리아에서 취리히로 레이스를 가져왔다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서 레이스 패턴 책이 인쇄되자 레이스 지식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확산됐고, 유럽 전역의 많은 곳에서 고품질 레이스가 제작됐다.
레이스가 새로운 직조 방식으로 널리 쓰인 시기는 16세기 후반이다. 귀족들의 여행과 왕실 간 결혼은 새로운 패션을 창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쫓겨난 레이스 제작자들은 오랜 시간 레이스를 제작해온 지역으로 이동해 자신만의 기술을 강화했고, 부유층을 위한 진취적인 패션 제조업체들은 시장에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혁신을 모색했다. 레이스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유행했다. 여러 개의 실을 사용한 보빈 레이스와 하나의 실을 사용한 니들 레이스다. 보빈 레이스는 여러 개의 실을 꼬거나 교차하는 방식으로 매듭 모양을 변형해 완성되고, 니들 레이스는 직물 조각을 이음새로 연결하고 가장자리를 루프로 장식하는 오픈워크와 리넨을 잘라낸 작은 공간에 장식용 스티치를 작업하는 컷워크 방식으로 구현됐다. 두 가지 모두 제작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디자인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저렴하고 빠른 보빈 레이스로 대체되었다. 금실과 은실, 고급 리넨 실 등 고가의 실을 활용한 레이스는 그 가치를 더욱 높였다. 명실상부하게 이 복잡한 소재는 귀족의 부와 권위를 상징하는 지표가 되었다.

레이스를 제작하는 모습을 담은 벨기에 엽서 속 사진. @vawaa_
1950년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쇼를 마친 디올. 레이스를 활용한 드레스가 돋보인다. @carolwoolton
보빈 레이스. @vawaa_
애니 슈뢰더(Anny Schröder)가 디자인한 레이스. @vawaa_

17세기의 레이스는 부드러운 금과 같았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국가가 후원하는 레이스 공방을 설립해 돈이 국외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했고, 영국은 법에 따라 수입 레이스를 착용할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해 권위를 유지했다. 레이스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역할로 발전한 것이다. 보다 넓은 면적에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은 17세기 후반이다. 여성복에 더욱 다양하게 사용되면서 레이스는 섬세하고 통풍이 잘되는 패턴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의 바늘 레이스인 알랑송, 아르장탕 그리고 블랙 보빈 레이스인 샹틸리 레이스 등 다양한 변형이 그 증거다.
19세기 초·중반 산업화와 민주화, 기술의 발전은 레이스를 대량생산으로 이끌었다. 수작업 기술에 비해 필요한 노동력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향은 레이스를 대중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더 이상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중산층과 중상류층도 즐기는 대중적 소재로 확장된 순간이다. 순결의 의미는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의 결혼식에서 비롯됐다. 여왕이 착용한 레이스 베일과 호니톤 레이스 드레스가 신부의 미덕과 로맨스의 상징으로 위상을 굳힌 것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의미를 넘어 레이스가 패션 소재로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한 시기는 20세기다. 코코 샤넬과 마들렌 비오네 등 유수의 디자이너는 바이어스 컷과 드레이핑 디자인을 통해 레이스가 의류의 일부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장했다. 디올이 ‘뉴룩’에 사용한 레이스 트림과 레이스 보디, 장갑과 베일은 물론 지방시의 쿠튀르 드레스도 빼놓을 수 없다. 레이스는 저항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패션 안에서 전복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현재 레이스는 전통과 혁신, 공예와 기술의 결합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레이저 컷 레이스와 3D 프린팅 등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레이스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발명 이후 패션 역사의 중심축에 자리한 레이스는 과거의 증언이자 미래 유산인 셈이다. 한 땀의 수공예에서 시작해 3D 프린팅의 정교함으로 진화한 레이스는 형태는 변했을지언정 본질적인 매혹은 잃지 않았다. 전통이라는 뿌리 위에 기술이라는 날개를 단 가벼운 갑옷은 다음 런웨이를 향해 우아한 도약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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