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고물가의 파고 속에서 지갑은 얇아졌지만, 삶의 온기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다. EBS1 ‘한국기행’이 선보이는 ‘가성비 투어’는 숫자로 환산되는 가격이 아닌, 사람과 시간에서 비롯된 가치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돈을 덜 쓰는 방법이 아니라, 같은 하루를 더 깊게 쓰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청주 육거리, 머리 손질을 넘어선 사람 냄새
충북 청주의 무심천 일대는 봄이 오면 벚꽃과 함께 활기를 띤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이어지는 육거리시장에는 오래된 시간의 결이 켜켜이 쌓여 있다. 여섯 갈래 길이 만나는 중심부답게, 사람과 물건이 끊임없이 오가며 시장 특유의 생동감을 만들어낸다.
그 골목 안쪽에 자리한 작은 미용실은 가격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2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비용이 사람들을 모으지만, 그들을 붙잡는 건 관계다. 평상에 둘러앉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점심이 되면 함께 국수를 나누며 하루를 이어간다.
손님과 주인의 경계도 흐릿하다. 바쁜 순간에는 서로 머리를 말아주고, 때로는 가게를 함께 지켜내며 공간은 시간을 나누는 공동체로 확장된다. 이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부산, 관광지 밖에서 만난 진짜 얼굴
부산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배길남 씨는 익숙한 도시를 낯설게 걷는다. 관광지의 화려한 풍경을 벗어나, 사람들의 생활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을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도시의 또 다른 결이 드러난다.
칠암의 작은 어촌에서는 해녀들이 바다와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막 건져 올린 해산물은 곧장 식탁으로 이어지고, 그 신선함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충분히 전해진다. 값보다 중요한 건 그날의 바다와 사람의 손길이다.
망미동 언덕의 오래된 구멍가게는 시간을 붙잡고 있는 듯하다.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주인의 태도는 장사가 아닌 관계의 연장선에 가깝다. 이어지는 옥상 마을의 풍경은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들며, 도시가 품고 있는 과거를 조용히 증언한다.
■상주, 세월을 끓여낸 한 그릇
경북 상주의 시장 골목은 한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중심지였다. 지금은 예전만큼의 북적임은 줄었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한가운데에서 오랜 세월을 버텨온 식당이 하루를 연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시작되는 영업은 생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곳의 해장국은 9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며 변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어져 왔다. 가격은 낮게 유지되지만, 그 안에 담긴 노력과 철학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단골들은 주문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의 취향을 알고 있는 관계 속에서 한 그릇은 자연스럽게 완성된다. 음식은 사람과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로 기능한다. 그 온기는 식당을 나선 뒤에도 오래 남는다.
■인천, 고장 난 장난감에 다시 숨을
인천의 한 지하상가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고장 난 장난감들이 이곳에 도착하면,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한다. 겉보기에는 작은 수리점이지만, 그 안에서 이뤄지는 일은 복원만 있는게 아니다.
이곳을 지키는 이들은 각자의 삶을 마친 뒤 새로운 역할을 선택한 어르신들이다. 전공과 경험은 다르지만, 손끝에 쌓인 기술은 여전히 살아 있다. 장난감 하나를 고치는 과정에는 세심함과 인내가 요구된다.
비용을 받지 않는 대신, 돌아오는 것은 짧은 감사의 말이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다시 손을 움직이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누군가의 추억을 이어주는 일, 그 자체가 이 공간의 존재 이유다.
■여수, 8만 원으로 완성한 여행
전남 여수에서의 여정은 제한된 예산이라는 조건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여행은 부족함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택과 집중을 통해 경험의 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식사 한 끼, 숙소 한 곳, 들르는 장소 하나까지 세심하게 계산된 동선은 낭비를 줄이면서도 만족을 끌어올린다. 숨겨진 명소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행의 본질이 드러난다. 화려함보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중심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를 썼는지가 아니다. 어떤 장면을 마음에 담았는지가 여행의 가치를 결정한다. 여수에서의 1박 2일은 그 사실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이번 ‘한국기행’은 가격표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을 한데 모은다. 절약을 넘어, 관계와 시간, 그리고 사람의 온기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갈 만한 이유가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차분히 전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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