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여태원 씨, 젊은 시절부터 책 있는 공동체 공간 꿈꿔
지자체 지원 없이 지인들과 준비…"사람 만나 소통하는 공간 되길"
[※ 편집자 주 = 저출산에 따른 인구 감소와 인구이동으로 전국에 빈집이 늘고 있습니다. 해마다 생겨나는 빈집은 미관을 해치고 안전을 위협할 뿐 아니라 우범 지대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농어촌 지역은 빈집 문제가 심각합니다. 재활용되지 못하는 빈집은 철거될 운명을 맞게 되지만, 일부에서는 도시와 마을 재생 차원에서 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매주 한 차례 빈집을 주민 소득원이나 마을 사랑방, 문화 공간 등으로 탈바꿈시킨 사례를 조명하고 빈집 해결을 위한 방안을 모색합니다.]
(속초=연합뉴스) 류호준 기자 = 강원 속초시 영랑동의 한 빈집이 주민들이 책을 읽고 머물며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 도서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주거 공간이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찾는 문화 공간으로 변신하면서 지방 도시의 고민거리인 빈집 문제 해결과 공동체 회복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속초 영랑동 주택가 골목에는 겉보기엔 평범한 주택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면 가득 책장이 들어서 있었고, 역사·철학·환경·생태·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지난달 7일 문을 연 이 공간은 마을도서관 '잇-다'다.
책상과 의자,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주민들이 자유롭게 머물 수 있도록 꾸며졌다.
마을도서관은 속초에서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여태원(62) 씨가 직접 조성했다.
여씨는 젊은 시절부터 언젠가 책이 있는 공동체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왔다.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도서관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서로 배우고 대화하는 공간을 꿈꿨다.
여씨는 "젊었을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 배우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 같은 곳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모아온 책들은 공간 조성의 밑바탕이 됐다.
마음에 드는 책은 직접 구입하고, 지인들과 서로 책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장서가 늘어났다.
지금 도서관에 비치된 책 상당수는 여씨가 수십 년간 모아온 개인 소장 도서다.
여기에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이 기증한 책들까지 더해지며 작은 마을 도서관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도서관이 들어선 건물은 원래 여씨의 세입자가 거주하던 주택이었다.
2024년 초 세입자가 떠난 뒤 한동안 비어 있던 집을 보며 여씨는 오래 품어왔던 구상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해 4월부터 본격적인 도서관 조성 사업을 시작해 2년여 만에 꿈을 완성했다.
이 도서관은 별도 상업 행위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운영된다.
아직 회원제나 대출 시스템은 마련되지 않았지만, 주민들이 들러 책을 읽고 쉬어가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산책객과 관광객들도 호기심에 문을 열고 들어와 둘러본다고 한다.
특히 영랑호와 가까운 입지 덕분에 주변을 찾은 방문객들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경우도 많다.
벚꽃 철에는 주변 도로가 붐비면서 우연히 공간을 발견한 관광객들이 들러 내부를 둘러보고 가기도 했다.
여씨는 이 공간이 단순히 조용히 책만 읽는 장소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주민들이 서로 얼굴을 익히고 지역 현안을 이야기하며, 작은 모임과 토론도 열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는 "책 한 문장만 읽고 가도 좋고, 그냥 잠시 쉬었다 가도 좋다"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근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늘어나는 빈집 문제 해결에 고심하고 있다.
철거나 방치에 그치지 않고 카페, 게스트하우스, 전시장, 공유 사무실, 주민 커뮤니티 시설 등으로 재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번 사례 역시 민간 주도로 빈집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추천 도서를 물었다.
여씨는 수많은 책 가운데 방문객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한 권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의 저서인 '의산문답'을 주저 없이 권했다.
그는 "환경과 생태 문제에 관심이 많아 관련 서적도 많지만, 한 권을 꼽으라면 의산문답"이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이어 "책 한 권이 사람 생각을 바꾸고 삶을 돌아보게 할 수 있다"며 "이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잠시라도 책장을 넘기며 자신만의 질문을 만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ry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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