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풍경] 서울에 남은 '태종' 권력의 능선 '헌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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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풍경] 서울에 남은 '태종' 권력의 능선 '헌릉'

뉴스컬처 2026-04-18 22:36:4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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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왕과 사는 풍경> 은 16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떠올리며 출발했다. 조선 왕릉은 우리 일상생활권에 있지만, 막상 선뜻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왕릉을 낯선 유적으로만 두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장소로 다시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헌릉 능침 전경. 사진=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헌릉 능침 전경. 사진=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서울 시내에서 닿는 조선 왕릉 가운데 헌릉(獻陵)은 결이 다르다. 숲길과 봉분, 정자각이 있는 왕릉이라는 점은 같다. 하지만 그 안에 놓인 시간은 훨씬 거칠다. 헌릉은 조선시대 제3대 국왕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능이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자락에 있다. 현 주소지는 서초구 헌인릉길 34다. 태조(太祖) 건원릉(健元陵)이 조선 개국 군주의 첫 무덤이었다면, 헌릉은 조선을 실제 통치 체제로 붙잡은 임금의 자리라고 해야 맞다.

헌릉은 처음부터 왕과 왕비를 함께 묻은 능이 아니다. 1420년(세종 2년)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능지가 잡혔다. 당시 태종은 자기 능 자리까지 미리 마련해 뒀다. 2년 뒤인 1422년(세종 4년) 태종이 세상을 떠난 뒤 서쪽에 태종 능을 더해 지금의 쌍릉(雙陵)이 갖춰졌다. 앞에서 바라보면 서쪽 봉분이 태종, 동쪽 봉분이 원경왕후다. 곡장 안에 두 봉분이 나란히 놓인 배치는 조선시대 쌍릉들 가운데서도 대표 격이다.

◇대모산 자락에 앉은 쌍릉, 헌릉의 자리와 조성

헌릉 능침은 조선 초 왕릉의 짜임을 품고 있다.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려졌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 영탁이 새겨졌다. 봉분 둘레에는 문석인, 무석인, 석마, 정중석,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가 차례로 놓였다. 문석인과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가 다른 능보다 많이 놓인 점도 특징이다. 고려시대 공민왕과 노국공주 현정릉(玄正陵)의 제도를 따른 결과로 보인다.

헌릉 석마. 사진=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헌릉 석마. 사진=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자리도 그냥 잡히지 않았다. 헌릉은 대모산을 주산으로 삼고, 중심 능선 끝자락에 앉았다. 북쪽에서 앉아 남쪽을 보는 건좌손향(乾坐巽向)이다. 조선시대 문헌은 대모산에서 한양(현 서울) 도성까지 거리와 주위 산세, 물길까지 적어 뒀다. 왕릉 하나를 마련하는 일이 봉분 두 기를 쌓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터를 잡고, 방향을 재고, 뒤 능선과 앞 물길까지 살핀 뒤에야 능이 세워졌다.

원경왕후 국장 때 조정이 움직인 규모도 작지 않았다. 세종은 왕후가 세상을 떠난 당일 국장도감(國葬都監·장례 행사 주관 임시 기구)을 뒀다. 신의왕후 한씨가 북한 개성에 안장된 제릉(齊陵)과 건원릉을 맡았던 박자청(조선 초기 대표 건축가)이 산릉도감(山陵都監·능침 조성 관장 임시 관서) 제조로 참여했다. 태종은 종전의 4도감 12색 체제를 줄여 3도감만 두고 나머지 일은 각사에 맡기게 했다. 능을 지킬 수릉군은 100호를 뒀다. 산릉 공사에는 경기도와 충청도 각 3천 명, 강원도와 황해도 각 2천 명, 수군 4천 명을 모아 총 1만4천 명을 동원했다. 왕비 능 하나를 만드는 데 많은 인력과 힘을 들였다.

태종 국장 때는 다시 꾸려졌다. 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세상을 떠난 당일 국장도감, 산릉도감, 빈전도감(殯殿都監·국왕 시신 주관 임시 관청)이 설치됐다. 박자청은 다시 산릉도감 제조가 됐고, 수릉관도 임명됐다. 이때는 흉년을 헤아려 인부 수를 줄였다. 수군 1천 명, 도성 안 1천 명, 가까운 고을 2천 명을 모았다. 소 수백 마리를 끌어 인력을 덜었다. 왕후 국장과 태종 국장은 사정이 달랐다.

◇방원에서 태종까지... 왕권 세운 군주 생애

헌릉이 무거운 이유는 능의 주인이 태종이기 때문이다. 태종은 1367년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이다. 이름은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이다. 1383년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 역대 국왕 중 과거급제한 임금은 태종이 유일하다. 젊은 시절부터 정치와 외교 한복판에 있었다. 고려시대 후기 학자인 이색(李穡)의 서장관 자격으로 남경(南京·중국 난징)에 다녀왔다. 정몽주 제거와 조선 건국 국면에서도 앞줄에 섰다. 건국 뒤에는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헌릉 항공. 사진=사진=국립문화유산연구원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헌릉 항공. 사진=사진=국립문화유산연구원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태종의 길은 곧장 왕세자 자리로 이어지지 않았다. 신덕황후와 정도전 세력이 세자를 방석 쪽에 세우자, 방원은 권력 중심에서 밀려났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터졌고, 정도전과 판을 뒤집었다. 이후 형 방과가 정종으로 즉위했으나 실권은 이미 방원으로 기울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까지 지나고 나서야 왕세자에 책봉됐다. 같은 해 11월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즉위 뒤 조선의 통치 틀을 다듬는 데 힘을 쏟았다. 창덕궁을 짓고, 1405년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겼다.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손질했다. 사병을 없애 군사권을 손에 모았다. 호패법(조선시대 신분증명서)을 시행해 인구를 파악했다.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정치체제))를 통해 왕이 직접 정사를 챙기는 체제를 굳혔다. 외척을 누르는 칼날도 이때 세웠다. 후에 세종의 시대가 넓어진 것도 태종이 군권과 인사권을 틀어쥐고 정리해 둔 데 있다.

1418년 태종은 장남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내렸다.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두 달 뒤에는 곧바로 왕위를 넘겼다. 그렇다고 손을 완전히 뗀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 다시 성덕신공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태종은 상왕이 된 뒤에도 군권을 놓지 않았다. 태종은 1422년 연화동 이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해 9월 태종이라는 묘호가 올라갔다.

헌릉 병풍석. 사진=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헌릉 병풍석. 사진=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원경왕후와 신도비, 헌릉에 남은 정치와 기록

헌릉은 태종의 능만은 아니다. 원래 원경왕후 민씨의 죽음에서 시작했다. 원경왕후는 1365년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딸로 태어나 1382년 이방원과 혼인했다. 조선 건국 뒤 정녕옹주(靖寧翁主)가 된 후 태종 즉위 뒤에는 정비가 됐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양녕대군, 효녕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과 네 공주를 뒀다.

원경왕후는 제1차 왕자의 난 직전 사병 혁파 뒤에도 무기와 병력을 친정집에 숨겨 뒀다. 태조의 병환이 깊던 날에는 복통을 핑계 삼아 태종을 궁에서 불러냈다. 민무구·민무질 형제까지 움직여 태종 쪽 손발을 묶었다. 난이 성공한 뒤 태종이 얻게 된 권력에는 원경왕후 몫도 컸다. 왕비가 뒤뜰에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후 두 사람 사이는 평탄하지 않았다. 태종은 외척을 눌러 왕권을 더 세게 쥐려 했다. 과정에서 민무구·민무질, 민무휼, 민무회가 차례로 제거됐다. 원경왕후는 1418년 세종 즉위 뒤 후덕왕대비(後德王大妃)가 됐으나 1420년 수강궁 별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그해 원경왕태후라는 시호와 헌릉이라는 능호를 올렸다. 9월 17일 국장이 거행됐다. 태종이 그 곁에 들어간 때는 그로부터 2년 뒤다.

헌릉에는 신도비 두 기가 있다. 첫 비는 1424년 헌릉 조성 뒤 세워졌다. 앞면 비문은 변계량이 짓고, 글씨는 성개가 썼다. 전액은 권홍이 맡았다. 뒷면 비문은 윤회가 지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모와 훼손이 심해지자 숙종은 1695년 신도비를 다시 만들게 했다. 새 비는 원래 비 오른쪽에 세웠다. 신도비는 2013년 보물로 지정됐다. 건원릉 신도비와 함께 조선 초 왕릉 신도비 연구에서 빠지지 않는 자료다.

헌릉 석양과 석호. 사진=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헌릉 석양과 석호. 사진=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헌릉은 조성 뒤에도 오래 손이 닿았다. 1442년에는 돌 틈에 물이 차 물길을 냈다. 1664년에는 정자각을 다시 세웠다. 1669년에는 도적이 정자각 신문과 제구를 부수는 일도 있었다. 숙종 때에는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영조와 순조 때에는 정자각 수리도 이어졌다. 1902년에는 비각과 정자각 수리 명이 내려갔다. 현대에도 재실과 비각, 수복방 손질이 이어졌다. 왕릉은 한 번 세우고 끝나는 건축이 아니었다. 세대마다 다시 손을 대며 이어 온 자리였다.

헌릉은 권력이 손에 들어온 뒤 어떻게 다듬어졌는지를 묻는 능이다. 서울 가까이에 있어도 가볍게 지나기 어렵다. 태종의 칼날과 원경왕후의 개입, 세종 이전 조선 정치의 긴장, 쌍릉이 한 언덕에 같이 놓여 있다. 때문에 헌릉은 태종의 조선 초기 권력이 서려 있는 능선을 따라 걷는 일에 가깝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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