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락] "풀밭과 메뚜기, 토끼가 있어야 호랑이도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정부가 '5극3특' 체제로 지방에 발전의 중심축을 만들 테니, 기업도 보조를 맞춰주길 바랍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월 4일 청와대 기업간담회에서 10대 그룹 총수들에게 '5극3특' 지역균형발전 체제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재계는 향후 5년간 10대 그룹의 270조 원을 포함, 전체 경제계 합산 300조 원 규모의 지방 투자를 약속하며 화답했다.
다만 이러한 대규모 자본의 유입이 자칫 '지방 속 제2의 수도권 만들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투자의 목적지가 이미 기초 인프라를 갖춘 특정 거점 도시에만 집중되면서 주변 중소도시를 오히려 소외시키는 '블랙홀 현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스락>뉴스락>은 10대 그룹의 비수도권 투자 계획과 그 이면의 구조적 과제를 짚어본다.
10대 그룹, 비수도권에 5년간 270조 투입...지방 산업지도 새로 쓴다
국내 10대 그룹이 향후 5년간 비수도권에만 270조 원을 쏟아붓는다. 경제계 전체 합산으로는 300조 원 규모다.
이재명 정부의 지역 균형발전 기조에 맞춰 재계가 구체적인 투자 일정과 금액을 확정하면서, 지방 산업 생태계 재편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월 주요 그룹 총수들과 만나 청년 일자리 창출과 지방투자 확대를 논의했다.
정부도 RE100 특별법 제정, 비수도권 투자 기업 금리 0.05%p 추가 인하, 150조 원 규모 국민성장펀드 중 60조 원(40%) 비수도권 의무 공급, 인허가 패스트트랙 등 제도적 뒷받침을 확정했다.
민간 자본이 지방에 안착할 수 있도록 규제와 재정 양면에서 지원 체계를 갖춘 셈이다.
삼성그룹은 비수도권에 60조 1,000억 원을 투입해 지역별 맞춤형 '마더팩토리'를 구축한다. 충청권은 반도체 패키지와 디스플레이, 경상권은 차세대 적층세라믹캐패시터(MLCC)와 스마트폰, 호남권은 스마트 가전 생산 거점으로 육성해 지역 산업 생태계를 고도화할 방침이다.
SK그룹은 충북 청주를 중심으로 총 39조 원 이상을 투입하며 반도체 초격차 확보에 나선다. 차세대 D램인 HBM(고대역폭메모리) 생산기지 'M15X' 구축에 20조 원 이상, 첨단 패키징 공장 'P&T7' 신설에 19조 원을 배정해 비수도권 반도체 거점을 완성할 계획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미래 모빌리티와 수소 생태계 조성을 위해 11조 원 이상을 지방에 배정했다. 전북 새만금 부지에 9조 원을 투입해 로봇 제조 클러스터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세우고, 울산에는 2조 원을 들여 전기차 전용 신공장을 건설해 전동화 전환 속도를 높인다.
LG그룹은 54조 원을 들여 충북 오창과 경북 구미 등지에 이차전지 소재 핵심 거점을 확충한다. 오창에는 차세대 4680 원통형 배터리 생산 라인을 증설하고, 구미에는 대규모 양극재 공장을 신설해 미래 친환경 에너지 산업 기반을 다진다.
포스코그룹은 40조 원을 투입해 포항과 광양 제철소의 설비 고도화와 수소환원제철(HyREX) 체제 전환을 추진한다. 탄소중립 시대에 대비한 친환경 철강 생산 기반을 지방 거점에서부터 선제적으로 확립한다는 구상이다.
롯데그룹은 총 37조 원 규모의 국내 투자 중 상당 부분을 비수도권 상권 및 산업단지에 집중한다. 울산 화학 부문의 고부가 스페셜티 소재 설비를 확대하고, 부산 등 비수도권 주요 도시에 대규모 복합쇼핑몰을 비롯한 유통·관광 인프라를 확충한다.
한화그룹은 11조 원을 들여 경남 창원과 대전 등 기존 거점을 강화한다. 창원 중심의 우주항공 및 방산 설비 확충, 대전 방산 연구개발(R&D) 인프라 확대를 통해 지역 밀착형 첨단 방위산업 생태계를 구축한다.
GS그룹은 전남 여수 등 주요 에너지 거점을 중심으로 21조 원을 투입한다. 소형모듈원전(SMR), 수소 등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 설비 구축과 신기술 개발에 자본을 집중해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할 계획이다.
HD현대는 전남 대불산단 등지에 15조 원을 투자해 AI 기반 스마트 조선소를 세운다. 친환경 선박과 로봇, 기계 분야의 대형 연구개발(R&D)을 추진해 국내 조선업의 중장기 경쟁력을 끌어올린다.
신세계그룹은 유통 인프라의 지역 균형을 위해 약 5조 원을 비수도권 복합 랜드마크 조성에 투입한다. 광주 광천터미널 복합 랜드마크(3조 원)와 어등산 그랜드 스타필드(1조 3,400억 원), 스타필드 창원(7,000억 원) 신설을 확정하며 지방 상권 활성화에 기여한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이번 투자가 5년간 525조 원의 생산 유발효과와 221조 원의 부가가치 창출로 이어질 것으로 추산했다.
수도권 집중 완화와 지역 일자리 창출이라는 정책 목표와 기업의 대규모 투자 계획이 맞물리면서, '5극3특' 체제 구상의 실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는 분위기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본부장은 "지역 경제 활력 회복의 불씨를 살리고, 청년 취업난 해소를 위한 기반 조성에 기업들이 앞장서고 있다"며 "계획된 지방 투자가 원활히 집행될 수 있도록, 정부․국회․지자체는 입지, 인·허가 규제 등의 허들을 걷어내고, 세제지원·보조금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비수도권에 쏟아지는 300조...'지방 속 수도권' 만드는 역설
대규모 자본의 비수도권 유입이 가시화되면서 지역 경제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반면 기업들의 투자 목적지가 이미 기초 인프라를 갖춘 특정 거점 도시에 집중되면서 '지방 속 수도권'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양극화도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실정이다.
금융권의 행보 역시 산업 자본의 거점화 전략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주요 은행들은 전주 종합금융타운 등 특정 거점 인프라 확충에 집중하는 데 반해, 산업 기반이 취약한 강원권 등은 대규모 투자에서 밀려나며 지역 간 편차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한 쏠림 현상은 교육과 산업 생태계 전반에서 확인된다. 첨단 인재 양성 인프라가 대도시에 몰리면서 주변 중소도시의 인재가 유출되는 현상이 우려된다.
또한 대기업 클러스터가 조성되더라도, 토착 중소기업과의 단가 문제 등 구조적 한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실질적인 낙수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강래 중앙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뉴스락> 과의 통화에서 "수도권 일극 체제에서 민간 자본의 비수도권 이동은 긍정적이나, 기업은 인재와 교통이 갖춰진 곳을 선호해 투자가 거점 도시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뉴스락>
이어 "이로 인해 거점만 커지고 주변 중소도시는 청년과 일자리를 잃는 '지역 내부 블랙홀'이 발생할 수 있다"며 "단순한 생산기지 유치를 넘어, 기업이 연쇄적으로 들어오는 산업 생태계 구축이 핵심"이라고 진단했다.
거점 육성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도 요구된다.
마 교수는 "정부는 '얼마'보다 '무엇'을 조건으로 지원하느냐에 집중해야 한다"며 "보조금 지급을 넘어 지역 인재 채용, 지역 대학과의 공동 연구, 지역 기업과의 공급망 연계, 정주 인프라 투자를 묶어서 지원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거점 중심 개발이 낳을 수 있는 부작용과 국가적 차원의 관리 필요성도 제기된다.
이호용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대규모 투자가 수도권 집중을 막는 방편이 될 수는 있으나, 특정 거점을 둘러싼 애드벌룬 띄우기식 과열 경쟁이 발생할 수 있다"며 "경쟁에서 밀려난 소외 지역은 더욱 고립되는 양극화가 가속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투자 흐름이 기본적으로 국토균형발전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각 권역별로 지나치게 독립된 새로운 지역 단위가 형성될 경우 과도한 분권화로 인해 국가 전체의 화합을 저해할 위험도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R&D는 수도권, 공장만 지방...'반쪽짜리 이전'의 딜레마
수십조 원의 투자금이 비수도권 땅에 쏟아지더라도, 핵심 인재가 따라오지 않는다면 대규모 공장은 텅 빈 껍데기로 남는다.
과거 혁신도시가 그랬듯, 지금의 대기업 클러스터도 같은 경로를 밟을 수 있다는 경고가 현실감을 더해가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2월 수도권 소재 중소기업 203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99.5%가 "지방 이전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이전을 기피하는 이유로는 '기존 직원의 지방 이전 기피(47.0%)'가 1위를 차지했고, 기존 거래처와의 물리적 거리 증가(44.6%), 물류 및 입지 조건 악화(32.7%), 인력 확보 어려움(28.7%)이 뒤를 이었다.
김희중 중기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비수도권 중소기업이 가장 크게 체감하는 문제는 인력 확보"라며 "지방균형발전을 위해서는 비수도권의 인력난 해결이 가장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용지원금을 포함해 중장년층·경력단절여성·외국인 근로자 등 다양한 인력 활용 정책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고, 근본적으로는 기업 경쟁력 강화를 통해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자동차 등 대형 생산 기지 구축을 공언한 주요 대기업도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 핵심 R&D 인력과 본사 주요 기능은 수도권에 두고 생산 라인만 비수도권으로 내려보내는 '이중 구조'가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2005년 시작된 혁신도시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153개 기관 소속 5만여 명이 전국 10개 혁신도시로 이동했지만, 민간의 연쇄 유입은 미미했다.
핵심 기능이 수도권에 남은 채 외형적 이전만 이뤄지면서 야간과 주말이면 도심이 비는 공동화 현상을 겪었다. 현재도 혁신도시로 이전한 공공기관 중 수도권 잔류 인력이 1,974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과거 혁신도시의 가장 큰 한계는 기관 건물만 옮겨갔을 뿐, 사람과 기회, 연결망이라는 생태계는 수도권에 남겨둔 것"이라고 진단했다.
마 교수는 "과거 혁신도시의 가장 큰 한계는 기관 건물만 옮겨갔을 뿐, 사람과 기회, 연결망이라는 생태계는 수도권에 남겨둔 것에 있다"며 "이번 투자도 생산기지만 지방으로 향하고 핵심 R&D 인력이 수도권에 남는다면 지방은 결국 '보조적 생산공간'으로 전락하고, 청년과 전문 인력은 다시 수도권으로 향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강조했다.
이호용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도 "혁신도시의 예에서 보듯 고급 인력은 수도권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며 "대기업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해당 지역 대학 배출 인력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지만, 수도권 우수 인재가 내려오지 않는 상황에서 그 인력의 경쟁력이 충분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문제의 해법은 쉽지 않다"며 "먼저 지방대학이 우수한 학생들로부터 선호되고, 그곳으로 진학하는 토대가 만들어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주 인프라 부족은 인재 유입을 가로막는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
마 교수는 "의료·교육·문화 등 기초 생활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역 우수 인재들마저 정착을 포기하게 된다"며 "생산시설 하나를 내려보내는 방식을 탈피해 사람과 산업, 생활이 어우러지는 종합적인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Copyright ⓒ 뉴스락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