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단 작가] 얼마 전, 로이터 통신이 뱅크시의 정체를 추적한 탐사 결과를 보도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50대 백인 남성으로 특정하고 있다. 난 그 사실이 맞는지보다, 왜 알아내려고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90년대부터 거리로 나가 독창적인 예술 활동을 이어간 뱅크시. 반자본주의나 반기득권을 표방한 작품 표현이 많다. 비판의 시선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익명성을 보장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목소리에 걸맞은 장르인 그래피티 자체가 불법인 점을 고려하면 익명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렇다면 언론을 포함한 세상은 대체 왜 뱅크시의 정체를 밝히려고 할까? 그에게 있어서 익명성은 작품에 대한 책임의 면피책이 아닌, 그의 작품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이며, 그래피티 특성상 작품 구조의 일부다. 전세계 많은 사람이 그의 시선과 통찰에 공감하거나 동경하고 꿈을 꾼다. 거리로 나서서 목소리를 내거나 주변을 돕는 등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작품을 통해, 행동을 끌어낸다. 여기서 익명성이 지워지면 뱅크시는 입장 표명을 촉구당하고 법적, 사회적, 상업적으로 불편을 겪을 수 있다.
저널리즘 정신을 내세워 뱅크시의 신원을 특정하겠다는 입장은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판단 같다. 이는 장르의 특성을 무시하며 예술의 작동을 방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공익성을 띠는 언론이 함부로 아티스트의 문법을 파괴하는 행위를 편안하게 바라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의 신원 미상이 공익을 해친다고 볼 수 있을까? 누구인지 밝혀져서 사회가 안전해지거나 그가 비판한 권력에 대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관광자원으로 변이되어 건물값이 오르고, 관람객이 몰리고, 경우에 따라 작품이 거래되며, 수익은 사회적 약자에게 기부되기도 한다.
예술을 위해 사회가 유지될 수는 없지만, 예술의 작동으로 지탱되는 사회를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체제를 부수지 않는다. 대신 체제가 스스로를 드러내게 한다. 조용하고 정확한 그의 시선에 사회가 열광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당해 보인다.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메시지를 피할 수 없다. 이력을 따져가며 그 의미를 줄일 수도 없다.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이 사회가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어긋남에서 눈을 돌려 여전히 그의 이름을 묻는 태도는, 결국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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