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카의 경쟁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전편에서 살펴본 복잡한 기술 구조 위에 또 하나의 ‘설계된 변수’가 얹힌다. 바로 BOP(Balance of Performance)다. 이 보이지 않는 규칙은 성능의 균형을 조정하며 레이스의 흐름 자체를 바꾼다.
WEC 하이퍼카 클래스는 제조사 간 성능 격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BOP 시스템을 적용한다. 출력과 차량 중량, 에너지 사용량을 조정해 경쟁 조건을 맞추는 구조다. 같은 규정 안에서 서로 다른 철학의 머신이 경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BOP는 공정성을 위한 규정이다. 특정 제조사의 독주를 억제하고 다양한 브랜드가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토요타, 페라리, 포르쉐, 캐딜락 등 여러 제조사가 한 무대에서 맞붙을 수 있는 배경에도 이 시스템이 자리한다.
BOP의 개념은 2000년대 중반 GT 레이스를 중심으로 도입됐다. 서로 다른 기술 구조를 가진 차량 간 경쟁을 성립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해법이었다. 이후 르망 24시간을 포함한 내구레이스와 GT3 카테고리로 적용 범위를 넓혔다. 특히 성능 차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졌던 LMP1 시대 후반을 거치며 다수 제조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장치로 자리 잡았다.
하이퍼카 클래스의 BOP는 WEC에만 적용되는 규정이 아니다. GT 월드 챌린지 유럽을 비롯한 GT3 기반 레이스, IMSA 스포츠카 챔피언십, 슈퍼GT GT300 클래스 등 주요 카테고리에서도 유사한 시스템이 활용된다. 특히 GT3는 플랫폼과 엔진 구조가 완전히 다른 모델들이 경쟁하는 만큼 BOP 의존도가 높은 대표적인 사례다. 결과적으로 BOP는 단순한 규정을 넘어 현대 모터스포츠를 지탱하는 공통 운영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BOP는 단일 요소가 아니다. 출력과 차량 중량, 하이브리드 에너지 사용량, 공기역학 특성, 연료 유량, 스틴트 길이 등 다양한 요소를 복합적으로 조정한다. 출력이 낮아지는 대신 중량이 줄거나, 반대로 출력이 허용되는 대신 에너지 사용량이 제한되는 식으로 ‘조합’을 통해 균형을 맞춘다.
이 때문에 제조사들은 단순히 경주차를 빠르게 만드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BOP 환경 속에서 성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개발 전략을 세운다. 레이스 운영 역시 마찬가지다. 팀은 BOP 조건을 전제로 타이어 전략과 에너지 운용, 피트스톱 타이밍을 설계한다. 핵심은 ‘가장 빠른 차’가 아니라 ‘현재 조건에서 가장 효율적인 차’를 만드는 데 있다.
하지만 BOP는 동시에 가장 민감한 변수이기도 하다. 수치 하나가 결과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출력이 소폭 낮아지거나 중량이 증가하면 직선 속도와 타이어 마모, 연료 전략까지 영향을 받는다. 반대로 완화된 조건을 받으면 특정 서킷에서 경쟁력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
이 때문에 BOP는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된다. 특정 제조사에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해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시스템이 없다면 현재와 같은 다수 제조사의 경쟁 구도는 유지되기 어렵다. 결국 BOP는 완벽한 해답은 아니지만 WEC를 지탱하는 가장 현실적인 균형 장치다.
하이퍼카 시대의 승부는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다. 규정과 기술, 전략이 맞물린 ‘설계된 경쟁’이다. BOP가 경쟁의 조건을 규정한다면 실제 승부는 그 안에서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음 편에서는 하이퍼카의 핵심 기술인 하이브리드 구조와 에너지 운용 방식이 레이스 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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