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용해 온 피리는 신락적, 횡적, 고구려적 세 종류다. 신락적은 ‘제천의례’에서부터 전해지고 있다. 피리의 길이는 33㎝, 구멍은 3개·7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구중이라는 사람이 피리를 처음 제작했다.
전통 음악에서 사용되는 악기 ‘패’는 ‘소각’이라고도 하는데 불교 전통악기로 불교에서는 교리를 음악으로 표현해 보급하기도 했다.
국립부여문화연구소는 백제 부여 사비왕궁터에서 1천500여년 전 피리와 목간을 발굴했다. 피리는 사비왕궁 경내 화장실로 추정되는 구덩이에 부러져 있었다. 피리의 탄소연대가 642년까지 나오며 568~642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 사비왕궁이 멸망한 660년과 큰 차이가 없다.
일본에서는 백제 부흥을 위해 제38대 사이메이 일왕(655~661)이 일본군 파견을 준비했다. 663년 일본군 수만명이 금강지역 등에서 신라와 당나라군에게 격퇴되는 일도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의 교류를 막으려고 군사 연합작전으로 신라의 중국 교역 뱃길을 차단했다.
백제, 고구려와 앙숙 관계가 된 신라는 당나라의 백제 공격에 합의했고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 13만명이 산둥성 내주를 출발해 백제 바닷가를 지나 부여 사비왕궁으로 향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5만 군사는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격하고 당나라 군사는 논산지역으로 육군과 수군이 공격하는 양면 작전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 660년 7월의 일이다.
사비왕궁을 점령한 신라와 당나라는 이곳에서 10여년 머물며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고 각종 행사를 통해 가무를 즐겼다. 중국 대륙에서 생활하던 우리 선조 동이인은 봄과 가을 제천의례를 열어 북과 피리 등을 연주했다. 제례를 마친 후에는 모두가 모여 가무를 즐겼다. 동이인의 문화가 중국 은허지역 상나라에 전파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의 음악과 무용이 더욱 발전했다. 고구려는 수와 당나라에 고구려 악단의 상설 무대를 설치했다. 고구려의 무용 호정무·지서무·괴뢰무와 내원성·연양·명주 등의 노래에 중국인은 매혹됐다.
신라에는 회소·가야·무애·처용 ·지백 등의 무용과 동경·본주·처용 등의 노래, 백제 음악은 30가지가 넘었다. 일본 황실 궁내청 의례에서 연주된 ‘납소이곡’은 백제의 고유 음악이 전래된 것이다. 제천의례부터 사용돼 온 우리의 악기 제작은 중국, 일본보다 앞선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우이·신구·윤성·인덕·산곤·안원·빈문·지심·노산·고사 등 주와현 56개 지역의 행정구역을 재설정했다. 피리와 함께 발굴된 하서·개비·감라·고란·이림 등의 목간은 당나라 행정구역명이었다. 피리의 구멍이 3개, 7개인 것은 백제뿐이 아닌데 혹 가야·신라·당나라·일본인들이 사용하던 피리를 백제 것으로 판명한 건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된다.
피리의 탄소연대를 검사하면서 가야·신라·백제·당나라·일본지역의 대나무 재질 및 유전자형 검사도 함께 이뤄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유적·유물 조사는 국적, 연대, 생활사, 문화 등을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완벽할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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