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이어진 고물가에 중동발 전쟁 여파까지 겹치며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낮아지면서 대용량 상품을 미리 구매해 쟁여두는 '벌크 소비'가 온·오프라인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보관하는 '팬트리 소비'까지 더해지고 있는 모습을 본 전문가들은 단순한 절약을 넘어 불확실한 환경에서 통제감을 확보하고자 하는 행동이라 분석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 대용량 소비가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16일 SSG닷컴은 올해 1분기 '쓱 트레이더스 배송'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8% 증가했다고 밝혔다. 쓱 트레이더스 배송은 창고형 할인점 상품을 온라인으로 주문해 원하는 시간에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로 최근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고물가와 더불어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계속해서 오르게 되자 대용량 상품을 한 번에 구매하려는 수요가 반영된 결과다.
그 중에서도 신선식품이 전체 성장을 견인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이 44% 증가하며 주요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비식품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이어졌다. 기저귀 매출은 114% 증가했고, 헬스케어와 헤어케어도 각각 90%, 53% 늘었다. 대용량 화장지와 세제 역시 판매 증가세를 보였다.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흐름은 오프라인에서도 확인된다. 이마트의 창고형 할인점인 트레이더스 홀세일 클럽은 올해 1분기 매출 1조602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9.7% 증가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이마트 전체 매출 증가율은 1.9%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다 저렴한 가격을 찾는 소비자들이 창고형 매장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뚜렷해진 것으로 풀이된다.
용량 혹은 개수만 다른 동일한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창고형 매장이 대형마트보다 조금 더 저렴한 것으로 나타났다. 르데스크가 직접 주요 상품 가격을 비교해 본 결과 대용량 중심의 창고형 매장이 상대적으로 더 저렴한 것으로 나타났다.
존슨즈 베드타임 베이비로션은 트레이더스에서 100ml당 1799원 수준인 반면 이마트에서는 3740원으로 두 배 이상 높았다. 매일두유(190ml) 역시 트레이더스는 100ml당 307원으로 이마트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됐다. 생필품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확인된다. 유한락스 욕실 청소용 제품은 트레이더스에서 개당 4495원으로 이마트보다 저렴했다.
라엘 오가닉 생리대 중형은 트레이더스가 개당 411원으로 이마트보다 낮았고 대형 역시 각각 500원과 595원으로 가격 차이를 보였다. 좋은느낌 입는 오버나이트 제품도 트레이더스는 개당 1176원으로 이마트 대비 가격 경쟁력을 보였다. 이처럼 대용량으로 구매할수록 단위당 가격이 낮아지는 구조가 뚜렷해지면서 소비자들이 창고형 매장과 온라인 벌크 구매로 이동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직장인 박수진 씨(32·여)는 "생리대처럼 단가가 높은 제품은 한 번에 비용 부담이 크더라도 대용량으로 구매해 쟁여두는 편"이라며 "그때그때 소량으로 사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더 저렴하고, 매달 사용하는 제품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 가격이 오르면 그때 사지 못한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주부 성희용 씨(63·여)는 "남편과 둘이 살고 있어 과일이나 채소처럼 쉽게 상하는 식료품은 필요할 때마다 소량으로 구매한다"면서도 "폼클렌저나 가글, 라면처럼 집에서 오래 보관이 가능한 제품은 가격이 저렴할 때 대용량으로 미리 사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집에 별도의 팬트리 공간은 없지만 수납할 곳을 따로 제작해서 쟁여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대용량 상품을 미리 구매해 보관하는 소비 방식은 최근 SNS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는 '팬트리 소비'와도 맞닿아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팬트리'를 검색하면 약 3만건 이상의 게시물이 노출되며 '#팬트리정리' 역시 1만5000건 이상 등록돼 있다. 게시물에는 대량으로 구매한 생필품을 용기별로 소분하고 정리하는 과정이 공유되고 있다.
유튜브에서도 관련 콘텐츠의 인기가 이어지고 있다. 구독자 2만5000명을 보유한 유튜버 일리숲이 지난 2024년 9월 공개한 팬트리 영상은 약 48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는 같은 시기 업로드된 집 공개 영상이나 식물 관리 영상보다 6배에서 30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고물가 시대 소비 심리 변화로 해석한다. 가격 상승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서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두려는 경향이 강해진 데다 정리된 저장 공간이 주는 통제감과 안정감이 결합되면서 팬트리 소비가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고물가 상황이 지속되면 소비자들은 미래 가격 상승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며 "이로 인해 필요한 물건을 미리 확보해 두려는 심리가 강해지고 이를 정리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팬트리 소비는 단순한 절약을 넘어 불확실한 환경에서 통제감을 확보하려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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