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풍경] 적막한 북녘 백마산 기슭에 남겨진 조선의 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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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풍경] 적막한 북녘 백마산 기슭에 남겨진 조선의 쌍릉

뉴스컬처 2026-04-14 17:14:1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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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왕과 사는 풍경> 은 16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떠올리며 출발했다. 조선 왕릉은 우리 일상생활권에 있지만, 막상 선뜻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왕릉을 낯선 유적으로만 두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장소로 다시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북한 개성에 위치한 후릉 능침 전경. 사진=국립문화유산연구원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북한 개성에 위치한 후릉 능침 전경. 사진=국립문화유산연구원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조선시대 왕릉은 대개 발걸음만 옮기면 닿는다.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언제든지 갈수 있는 곳이다. 숲길을 따라 들어가 봉분을 보고, 정자각 앞에 서고, 능선 아래를 천천히 돌아 나오는 식이다. 후릉(厚陵)은 가까이에 있지만 가까이 갈수 없는 능이다. 왕과 왕비의 봉분이 한 능 안에 나란히 놓인 쌍릉(雙陵) 형식, 고려 왕릉 제도 흔적, 작은 석물 규모가 뒤 시기 왕릉에 끼친 영향까지 한꺼번에 얽혀 있다.

◇개성 백마산에 남은 후릉… 닿지 못하는 조선 쌍릉

후릉은 조선 제2대 왕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의 능이다. 개성 백마산 기슭, 옛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 자리에 있다. 북한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경기도 판문군 령정리다. 태조의 첫 비 신의왕후의 제릉(齊陵)과 함께 북녘에 남은 왕릉 중 하나다. 1412년 정안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성됐다. 태종 12년 6월 25일 정안왕후가 인덕궁에서 눈을 감았다. 조정은 능지를 정하고 후릉이라 이름했다. 산릉군 3천 명이 동원됐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7년 뒤인 1419년 세종 원년에 정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비 능 곁에 동일한 형식의 능실을 더해 지금의 쌍릉이 됐다.

후릉은 한 곡장 안에 봉분 두 기를 나란히 둔 동원쌍릉이다. 널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서쪽 봉분이 정종의 능, 동쪽 봉분이 정안왕후의 능이다. 우왕좌비(右王左妃)가 아니라 왕이 서쪽, 왕비가 동쪽에 놓이는 형태다. 문헌 등 해석에는 엇갈이는 대목이 있어 봉분 위치는 확실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정안왕후가 먼저 묻히고 뒤에 정종이 곁에 들어간 점도 후릉의 성격을 규정한다. 조선은 후릉 뒤부터 같은 능역 안의 왕과 왕비 능을 하나의 능호로 묶는 방향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왕과 왕비 능에 각기 다른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있었다. 

◇송악산 자락 능역, 석물 배치와 관리의 흔적

후릉은 송악산 줄기와 이어지는 언덕에 기대어 앉아 있다. 북쪽에 자리하고 남쪽을 향한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전통 풍수 기준으로 잡은 자리라는 설명이다. 능원 뒤 능선에는 송림이 배경처럼 둘러서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에는 재실이 능침 동쪽 바깥 자락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재실 서쪽에는 연지(蓮池)도 있었다. 길이와 너비 등 후릉은 봉분만 놓인 빈 터가 아니었다. 제향과 수호, 일상적 관리가 이어지던 왕릉 구역 전체를 갖춘 자리였다.

세종 때 기록에는 후릉 소나무를 벌레가 갉아먹어 경기와 황해의 관청이 함께 처리했다는 대목이 있다. 벼락이 소나무를 친 뒤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사초지의 쑥대와 잡초를 제사 뒤 점검해 한식 무렵 뽑았다는 내용도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계절마다 손이 닿아야 하는 관리 대상이었다. 후릉 관리 체계도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갖춰졌다. 1414년 태종은 능직 2인을 뒀다. 1420년에는 수호군 20호를 더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후릉 수호를 맡은 군호와 토지 지급 내역까지 적혀 있다. 흥교사를 재궁으로 삼고 토지를 준 사실도 보인다. 왕릉 관리가 인력과 토지까지 붙는 행정 체계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개성에 위치한 후릉 동측 석물 전경. 사진=국립문화유산연구원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북한 개성에 위치한 후릉 동측 석물 전경. 사진=국립문화유산연구원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후릉은 화재와 수리 기록도 적지 않다. 1544년 중종 39년에는 후릉 정자각에 불이 나 건물과 신좌의 평상, 기물이 모두 탔다. 후릉 참봉의 침탈을 견디지 못한 수호군이 불을 질렀다는 기록은 왕릉 관리가 늘 평온하지만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조정은 관련 인물을 처벌하고 정자각을 다시 세웠다. 현종 대에는 석물 상태를 두고 논의가 이어졌다. 1666년 조사 때 사대석과 병풍석, 상석에 잡석이 섞여 있다. 망주석과 석양, 석마는 크기가 작고 조각도 흐리다는 지적이 나왔다. 공사를 어디까지 할지를 두고 말이 오갔다. 결국 상석 교체를 중심에 둔 정비가 이뤄졌다. 뒤에도 1796년, 1829년, 1854년, 1864년에 손을 봤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후릉 봉분 구조는 조선 초 능제의 틀을 잘 남긴다. 상중하 3단 구성을 취했고, 각 단에는 석물이 층위별로 놓였다. 봉분 둘레에는 12각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섰다. 병풍석 면석 중앙에는 운채를 배경 삼은 수관인신형의 십이지신상이 새겨졌다. 모서리 우석에는 영저와 영탁을 배치했다. 만석과 지대석에는 앙련과 복련 문양을 더했다. 인석에는 화문을 새겼다. 후릉 석물은 수가 적지 않다. 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가 차례로 놓였다. 문무석인과 석마, 석양, 석호는 다른 왕릉보다 많이 배치됐다고 전한다.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이었다는 말이 붙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후릉 석물은 조선 왕릉 가운데 가장 작다는 평도 함께 따라다닌다. 숙종 대에는작은 규모를 정종의 검소함과 연결해 읽었다. 후에 왕릉 석물 규모를 줄일 때에는 후릉 척수를 끌어다 썼다. 장릉(莊陵), 사릉(思陵), 명릉(明陵)에도 기준이 영향을 줬다고 알려진다. 후릉은 화려함보다 절제 쪽에 가까운 능으로 기억된다. 현재는 표석만 남아 있고 정자각은 사라졌다. '춘관통고'에는 정자각, 수라청, 망료위, 표석, 홍살문, 전사청, 제기고, 안향청, 재실, 연못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옛 구성은 온전히 남지 않았다. 그래서 후릉은 더 적막하다. 남은 기록은 많지만, 남은 형체는 많지 않은 것이다.

◇정종과 정안왕후, 7년 간격 끝에 갖춰진 후릉

능의 주인인 정종은 1357년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이름은 방과(芳果), 자는 광원(光遠)이다. 국왕에 오른 뒤 이름을 경(曔)으로 고쳤다.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왜구를 막는 전장에 나섰다. 1377년 지리산에서 왜구를 방어했고, 1390년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밀직부사에 올랐다. 조선이 건국되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 절제사와 의흥삼군부 중군절제사를 맡았다. 1398년 왕자의 난 직후 왕세자에 책봉됐다. 실권은 아우 정안공 방원 쪽에 있었다. 하지만 방원은 영안군이 태조의 적장자라는 명분을 내세워 형의 세자 책봉을 밀었다. 정종은 그해 9월 5일 태조 선위로 국왕이 됐다. 

정종 재위는 길지 않았으나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 옮겼고, 집현전을 두고는 경적을 강론하게 했다. 분경을 금해 청탁을 막고, 사병을 혁파해 의흥삼군부에 편입했다. 왕위 계승 구도도 이 시기에 굳어졌다. 1400년 2월 정안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그해 11월 11일 왕위를 내줬다. 태종은 형에게 인문공예상왕(仁文恭睿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왕위에서 물러난 정종은 개성 인덕궁(仁德宮)에 머물렀다. 격구와 사냥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419년 9월 26일 인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2월 세종이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라는 시호와 후릉이라는 능호를 올렸다. 1420년 1월 3일 장사가 치러졌다. 4월에는 명나라 황제가 내린 공정(恭靖) 시호 탓에 공 자가 겹친다는 이유로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으로 고쳤다. 1681년 숙종은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를 정하고 의문장무(懿文莊武)를 더 올렸다.

북한 개성에 위치한 후릉 원경. 사진=국립문화유산연구원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북한 개성에 위치한 후릉 원경. 사진=국립문화유산연구원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정안왕후 김씨는 1355년 태어났다. 판예빈시사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며 본관은 경주다. 1398년 정안군이 왕세자로 책봉될 때 덕빈(德嬪)에 봉해졌다. 정종 즉위 뒤 덕비(德妃)가 됐다. 1400년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라는 존호를 받았다. 인자하고 후덕했다. 정종에게 선위를 권해 천수를 다하게 했다는 평가다. 정안왕후는 1412년 6월 25일 인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7월 20일 정안왕후라는 시호와 후릉이라는 능호를 올렸다. 1681년 11월 숙종은 온명장의(溫明莊懿)라는 시호를 더했다. 후릉은 먼저 세상을 떠난 정안왕후의 능으로 시작된 자리다.

정종이 1419년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곧 국장도감과 산릉도감을 두고 담당 관리를 임명했다. 그해 12월에는 개토제, 참토제, 발인, 반우주 절차가 정리됐고, 이듬해 1월 3일 국장이 거행됐다. 후릉은 두 사람의 죽음이 7년 간격을 두고 차례로 완성된 능이다.

우리 생활권 가까이에 있지만 자주 지나쳤던 왕릉을 다시 보자는 취지에서 후릉은 생활권 바깥에 있다. 통일이 되지 않는 한 현재 상황에서는 갈 수 없기 때문에 오래 기록을 더듬게 한다. 조선 초 왕릉 제도의 틀과 균열을 함께 읽게 하기 때문이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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