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반도체가 최대 3000개를 넘어서는 시대가 됐다. 엔진 성능보다 소프트웨어가, 외관 디자인보다 차량 내 디지털 경험이 구매 결정을 좌우한다. 자동차가 '바퀴 달린 전자제품'으로 재편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삼성전자의 전장 사업 포석도 선명해지고 있다. 반도체·스마트폰·가전을 아우르는 전장 기술력을 자회사 하만에 집중시켜 차량의 정보·통신·주행을 통합 운영하는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 시장의 핵심 플랫폼 사업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했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하만은 지난 8~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프로젝트 스페이스 라인에서 '하만 익스플로어 코리아(HARMAN Explore Korea) 2026'을 열고 현대자동차·기아 등 국내 주요 완성차 업체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차세대 전장 기술을 공개했다.
행사의 핵심은 삼성 계열 기술이 집약된 '하만 로드 레디(HARMAN Road-Ready)' 플랫폼이다. 5G 통신, 네오 QLED 기반 차량용 디스플레이, 스마트싱스 연동, 클라우드 기반 개발·검증 플랫폼 등을 하나로 묶어 디지털 콕핏·커넥티비티·오디오를 통합 운영하는 구조다. 무선 소프트웨어(OTA) 업데이트와 차량용 앱스토어, 하이퍼바이저 기술을 통해 차량 기능을 지속적으로 확장·업데이트할 수 있다는 점도 이날 강조됐다.
삼성이 주목하는 시장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한국자동차연구원에 따르면 글로벌 자율주행차(레벨3·4) 시장 규모는 2025년 1549억 달러(약 209조원)에서 2035년 1조 달러(약 1347조원)로 연평균 4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이미 자동차가 더 이상 '머캐닉(mechanic)'적인 완성도와 엔진·구동계 노하우만으로 경쟁하는 구조가 아니라고 진단한다. 대신 소프트웨어·통신·AI·센싱·디스플레이 등이 결합된 첨단 모빌리티로 바뀌고 있다. 글로벌 완성차 업계는 앞다퉈 SDV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수십조원 규모 투자를 예고했다.
자율주행·커넥티드카·전동화가 맞물리며 SDV 전환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하드웨어 성능보다 소프트웨어·통신·AI·데이터가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하면서 플랫폼 사업자의 역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삼성의 전장 전략이 완성차를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성차 업체들이 채택할 수 있는 모듈형·확장형 플랫폼 공급자로 자리잡는 데 초점을 맞추는 이유다.
이 전략의 근간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전자는 당시 80억 달러(약 9조원)를 투입해 하만을 인수하며 인포테인먼트·카오디오·디지털 콕핏 분야 글로벌 경쟁력을 단숨에 확보했다. 이후 반도체·메모리·디스플레이·AI·5G 기술을 차량 전장에 접목하며 SDV 시장 진출 기반을 다져왔다. 2018년에는 AI·차량·로봇 등 미래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예고하며 자율주행용 두뇌·센서·통신장치·디스플레이·스토리지를 내부에서 공급하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한 바 있다.
지난해 말에는 이 구상이 대형 인수로 한층 구체화됐다. 하만을 통해 독일 ZF의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사업부를 15억 유로(약 2조6000억원)에 사들이며 전방 카메라, ADAS 컨트롤러, 센서 융합, 주행 보조 알고리즘 등 핵심 기술을 확보했다. 하만의 디지털 콕핏·오디오 역량에 ZF의 주행·안전 기술을 결합해 중앙집중형 SDV 플랫폼을 완성하겠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
인수 이후에도 투자와 조직 재편은 현재 진행형이다. 하만은 헝가리에 약 2300억원 규모의 R&D·생산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유럽 완성차 대응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삼성 계열사들도 인공지능(AI) 서버와 자율주행, 전기차용 고전압·고용량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등 핵심 부품 생산 확대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시장 환경도 우호적이다. 업계에서는 ADAS 시장이 2025년 400억 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2035년 10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본다. 자율주행·커넥티드카·전동화가 맞물리며 SDV 전환이 빨라지는 가운데 삼성은 갤럭시·스마트싱스·하만 디지털 콕핏을 하나의 커넥티드 생태계로 묶어 시장 선점에 나서고 있다. 앞으로 자동차는 단순 이동 수단을 넘어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스마트 플랫폼으로 변모할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은 더 이상 특정 완성차에 부품을 공급하는 전장 기업에 머무르지 않고, SDV 시대의 핵심 플랫폼 사업자로 진화하려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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