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강원 삼척에서는 정월 대보름이면 큰 줄다리기판이 선다. 1976년 강원도 시도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삼척기줄다리기다. 삼척에서는 ‘게’를 ‘기’라 불렀다. 큰 줄에 달린 작은 줄이 게 다리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게가 잡귀를 막는다고 믿었다.
◇게를 닮은 줄, 대보름 밤을 여는 큰판
삼척기줄다리기 유래는 한 갈래로 정리되지 않는다. 널리 거론되는 얘기만 네 갈래다. 조선 18대 국왕 현종(1659년~1674년) 때 삼척부사 허목이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손보던 시절. 제방 공사를 마친 뒤 제사를 올리고 풍년을 비는 판이 벌어졌고, 그 자리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는 유래다. 정월 대보름 점풍 행사 한 갈래로 보는 쪽도 있다. 해안 쪽 부내가 이기면 바다 일이 잘되고, 산곡 쪽 말곡이 이기면 농사가 잘된다고 믿었다. 마을 부역과 엮는 말도 있다. 읍성 수리나 제방 공사 같은 노역과 관련 있었다는 얘기다. 잡귀를 막는 벽사 쪽에 무게를 두는 설명도 있다. 경기장인 사대광장 일대가 형장 가까운 곳이라 잡귀가 많다고 여겼고, 게 모양 줄로 이를 눌렀다는 말이다.
삼척기줄다리리기는 줄 하나만 두고 겨루는 장면에 그치지 않았다. 마을 안 작은 놀이서 고을 전체가 모이는 큰판까지 차례로 커졌다. 정월 초 아이들은 마을 안에서 속닥기줄을 당겼다. 이름 그대로 작은 줄이었다. 어른은 끼지 않았다. 정월 7일, 8일 무렵에는 청소년이 앞에 서는 중기줄로 판이 커졌다. 대보름날 밤이 되면 해안과 산곡이 편을 갈라 큰기줄을 당겼다. 작은 줄, 중간 줄, 큰 줄이 차례로 이어졌다.
◇부내와 말곡, 동쪽과 서쪽이 맞붙은 밤
오십천이나 삼척 읍성을 가름선 삼아 동쪽 부내와 서쪽 말곡으로 나뉘었다. 부내는 해안지방, 여성 쪽에 가까웠다. 말곡은 산곡지방, 남성 쪽에 가까웠다. 부내가 이기면 해사가 잘되고, 말곡이 이기면 농사가 잘된다고 여겼다. 어느 한쪽만 복을 가져가는 판은 아니었다. 누가 이겨도 고을 전체가 잘되길 바라는 판이었다.
줄 만드는 일도 큰 행사였다. 각 동리마다 줄을 따로 마련한 뒤 사대광장에 모아 본줄로 이었다. 몸줄은 짚이 바탕이었다. 끊어짐을 막으려고 속줄에 칡을 넣었다. 바깥을 새끼줄로 감았다는 말도 남아 있다. 줄을 틀 때는 술비통을 썼다. 새끼줄과 칡줄을 여러 가닥 모아 한 줄로 키우는 일을 되풀이했다. 풍악을 울리고 노래를 불렀다. 이를 ‘술비통노래’라 했다. 줄을 만드는 일 자체가 이미 놀이판 한가운데 있었다.
대보름 당일 풍경은 더 컸다. 각 마을 사람들은 자기편 줄을 메고 시가를 행진했다. 마을기와 영기, 농악대, 가장행렬, 남녀노소가 긴 줄 뒤를 이었다. 동리별 전사들이 집결한 뒤에는 다시 사대광장에 모여 최종적으로 줄을 잇고 마두와 본체를 맞췄다. 비녀목은 지름 35센티미터, 길이 2미터쯤 되는 향나무나 박달나무를 썼다고 한다. 기줄 전체 길이는 약 200미터, 줄머리 높이는 지상 2미터 안팎까지 올라갔다.
본판은 달빛과 광솔불 아래서 열렸다. 징 소리가 나면 남녀 가릴 것 없이 줄을 잡았다. 인원 제한도 따로 없었다. 마두에는 파장이, 중간에는 부파장이, 뒤에는 보통파장이 서서 기와 몸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기를 눕히면 줄을 땅에 까는 뜻이다. 좌우로 흔들면 힘만 주라는 뜻이다. 동서로 흔들면 구호에 맞춰 당기라는 뜻이다. 동쪽 부내 쪽은 청룡기, 서쪽 말곡 쪽은 백호기를 앞세웠다. 모래를 발로 파고, 여자들은 치마에 돌을 담아 무게를 더해 줄을 잡았다는 말도 전한다. 술을 마시고 줄을 당기기도 했다.
승부는 쉽게 갈리지 않았다. 줄다리기는 자정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해 새벽 4시나 5시가 돼서야 끝났다고 한다. 서둘러 이기고 끝내는 놀이가 아니었다. 서로 버티고, 밀고, 당기며 밤을 다 쓰는 판이었다. 진 쪽은 조용히 물러났고, 이긴 쪽은 풍악을 울리며 뒷놀이를 벌였다.
◇제사와 놀이가 섞인 고을 축제
삼척기줄다리기에는 제사도 붙었다. 입춘 무렵 선농단에서 풍년을 비는 선농제를 올린 뒤 농악을 앞세워 시가를 돌았다. 줄다리기 전 서낭당 제사를 지내는 마을도 있었다. 줄도 1년 동안 서낭당에 모셔두었다는 말이 남아 있다. 놀이판과 제사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마을과 고을이 비는 마음, 함께 노는 몸짓이 한판 안에 섞여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삼척기줄다리기는 끊겼다. 다시 모습을 갖춘 때는 1973년이다. 삼척민속놀이위원회가 꾸려졌다. 정월 대보름 사대광장에서 기줄다리기를 앞세운 삼척민속대제전이 열리며 복원됐다. 이후 강원도 무형문화재 지정도 받았다. 사대광장이 매립된 뒤에는 중앙통 주도로나 오십천 고수부지로 자리를 옮겨 이어왔다.
삼척기줄다리기는 줄다리기 한 종목만 놓고 볼 수 없다. 줄을 만드는 술비놀이, 조비농악, 시가행진, 가장행렬, 서낭 제사, 뒷풀이가 한데 붙는다. 자갈밭과 모래밭서 벌어진다는 점도 삼척 쪽 결이 짙다. 해안과 산곡, 동쪽과 서쪽, 여성과 남성 상징이 맞서지만, 끝에는 고을 모두의 풍년과 풍어를 빈다. 삼척기줄다리기가 싸움판이기보다 고을 전체가 몸으로 치른 대보름 큰판에 가까운 까닭이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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