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글로벌 반도체 경쟁의 무게추가 기술 개발에서 인재 확보로 이동하는 양상이다. 중국은 국가 차원의 인재 흡수 전략을 강화하고 있고, 글로벌 빅테크는 고연봉과 연구 환경을 앞세워 핵심 인력을 끌어들이고 있다. 양쪽에서 동시에 압박받는 구조 속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인력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14일 한국은행이 국내 체류 이공계 석박사 인력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42.9%가 3년 내 해외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금전적 보상뿐 아니라 연구 환경과 네트워크, 경력 기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업계에서는 인재 확보 경쟁이 단순 채용을 넘어 국가 간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 양상은 ‘조용한 전쟁’으로 불릴 만큼 인재 확보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이 확인된다. 중국은 수출 통제와 같은 외부 변수보다 인재 확보를 통해 기술 격차를 줄이는 전략에 집중하고 있고, 대만 등 주요 반도체 거점에서도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한 단속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전략도 빠르게 진화하는 모습이다. 초기에는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에 진입했다면, 최근에는 공급 공백을 공략하고 인재 확보를 통해 기술 격차를 줄이는 ‘단계적 확장 전략’이 나타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HBM 등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생산을 전환하면서 범용 메모리 공급이 줄어든 틈을 중국 기업들이 파고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YMTC와 CXMT 등은 생산능력을 확대하며 물량 기반을 확보하는 동시에 첨단 공정 인력을 확보해 기술력까지 끌어올리는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기술 격차를 단기간에 줄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인재 확보가 가장 빠른 해법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글로벌 빅테크까지 가세하면서 인재 확보 경쟁은 더 격화되는 분위기다. 엔비디아, 애플, 퀄컴, 미디어텍 등 주요 기업들은 최근 한국에서 HBM과 3D D램 관련 인력 채용을 확대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하는 연봉은 20만~30만달러 수준으로 많게는 4억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반도체 핵심 인재들이 국내 기업과 해외 기업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닌, 글로벌 시장을 기준으로 이동하는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현장에서도 이런 흐름은 확인된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국내 채용 확대와 함께 해외 취업과 이민을 고려하는 엔지니어가 늘고 있다는 전언이다. 업계에서는 “A급 인재는 국내에 남고 S급 인재는 해외를 선택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력 이동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문제는 인력 유출 압력이 대기업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보상 여력이 낮은 중소·중견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은 이중 압박에 직면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로벌 기업과 국내 대기업 간 경쟁에 더해 해외 기업까지 가세하면서 인력 확보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국내에서도 반도체 인력에 대한 관심 자체는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 개선과 성과급 확대를 계기로 반도체 계약학과 인기가 급등하며 입시 지형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주요 대학 반도체 관련 학과 경쟁률은 의약학 계열에 근접하거나 일부 웃도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와 반도체 계약학과를 동시에 지원하는 현상도 감지된다.
최근 나타나는 흐름이 곧바로 산업 현장의 인력 부족 해소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반도체 계약학과 경쟁률이 의약학 계열에 근접하거나 일부 웃돌 정도로 인재 유입이 확대되고 있지만, 중장기적 인력 공급에 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 기업들은 HBM 설계, 공정, 패키징 등 실무 경험을 갖춘 ‘즉시 투입 가능한 인력’을 요구하고 있어 교육 과정 중심의 신규 인력과 현장 수요 간 간극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업계에서는 인력 유입 확대에도 불구하고 핵심 인재 공백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려운 구조라는 평가도 제기. 박사급 연구인력의 수요와 공급 간 불일치로 연구 단절과 해외 유출 우려가 동시에 언급되는 상황도 이런 구조적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정부도 대응에 나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기업 수요 기반 연구를 중심으로 대학·출연연과 공동으로 수행하는 ‘전략기술 박사후연구원 산학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박사급 인력의 연구 단절을 줄이고 산업 현장 연계를 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컨소시엄 단위로 박사급 연구인력을 의무 채용하고, 연구개발부터 기술이전·실증까지 사업화 전 과정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업계에서는 이런 지원이 단기 프로젝트 중심에 그칠 경우 인력 유출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개별 기업 대응을 넘어 국가 차원의 중장기 인력 전략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반도체 인력에 대한 장기 보상 체계 구축이나 국가 핵심 연구인력 지정 제도 도입, 대만식 산학연 협력 모델 도입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대만처럼 연구소·대학·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태계를 구축해 인력 이동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 인재로 이동하는 흐름 속에서 한국은 공급과 활용, 유출 방지까지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지금까지는 기술과 자본 경쟁이었다면 앞으로는 인재 확보 속도가 경쟁력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온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좋은 보상과 연구 환경을 통해 인재가 국내에 남을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야 한다”며 “특히 엔지니어의 경력 전반을 고려한 장기적 보상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도 “국내 기업에서 장기간 연구개발을 수행한 인력을 국가 핵심 인력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활용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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