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드] 미국과 이란의 전면전으로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사실상 제한되면서 한국 산업의 ‘보이지 않는 급소’가 드러나고 있다. 원유·나프타뿐 아니라 반도체와 의약품, 전자·화학 산업의 필수 소재인 헬륨과 브롬이 중동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공급망 재점검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3일 한국무역협회가 발표한 ‘중동 지정학 리스크의 국내 공급망 영향’ 분석에 따르면,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중동 전쟁 장기화 가능성에 따라 글로벌 에너지·원자재 공급망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보고서는 “중동 리스크가 길어질 경우 단순한 에너지 가격 상승을 넘어 석유화학 원료와 산업 소재의 공급 차질이 중간재 공급망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무역협회는 중동 의존도, 대체 가능성, 국내 산업 영향도, 공정 중단 위험도를 기준으로 8대 핵심 영향 품목을 추려 대응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원유·나프타 외에 헬륨, 브롬, 암모니아 등에서 중동 의존도가 높아,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반도체, 전자, 석유화학,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공정 안정성이 직접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 공정의 냉각재로 쓰이는 헬륨은 천연가스 처리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액화천연가스(LNG) 생산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영하 269도에서 유지·운송해야 하는 특성상 특수 인프라가 필요하고 운송 중 증발 위험도 커 생산에서 최종재까지 공급망의 연속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의 헬륨 수입 구조는 카타르 편중이 심각하다. 지난해 국내 헬륨 수입량의 64.7%가 카타르에서 들어왔다. 카타르는 전 세계 헬륨 공급의 30% 이상을 담당하는 최대 생산국이다. 일부 공정에서는 질소나 아르곤 등으로 헬륨을 부분 대체할 수 있지만, 헬륨 특유의 높은 열전도율 때문에 완전한 대체는 불가능하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최근 이란의 드론 공격으로 카타르 최대 헬륨 생산단지가 가동을 멈추면서 불안은 현실이 됐다. 글로벌 헬륨 생산국이 미국, 러시아 등 소수에 그쳐 수입선 다변화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삼성전자 등이 일부 라인에 ‘헬륨 재사용 시스템’을 도입해 단기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사태가 장기화하면 수급 위기를 피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헬륨 가격은 이미 급등한 상태로, 정부와 업계의 선제적 수급 대책 마련이 요구된다.
난연제, 의약품, 반도체 등 다양한 산업에서 쓰이는 브롬의 공급 구조도 취약하다. 브롬은 일부 용도에서 염소나 요오드 등으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반도체 식각 공정에서는 대체 여지가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은 브롬 원재료의 97.5%를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있어, 중동 정세와 외교 관계 변화에 따라 공급망이 직접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반도체 공정에서는 브롬과 수소를 고온에서 반응시켜 불순물을 제거한 고순도 브롬화수소(HBr)를 주로 사용한다. 브롬화수소의 지난해 기준 한국 수입 비중은 일본이 46%로 가장 크고, 이어 미국 25%, 이스라엘 13% 순이다. 그러나 일본 역시 이스라엘산 브롬을 들여와 중간재로 가공하는 구조여서, 겉으로 보이는 수입선 다변화에도 공급망의 ‘뿌리’는 여전히 중동에 묶여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브롬 관련 공급망 우려에 대해 “현재 브롬화수소는 차질 없이 수입되고 있으며 국내 비축 재고도 약 3개월분 이상으로 평상시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며 “반도체 생산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중동 리스크가 장기화할 경우 재고만으로 버티기 어렵다는 점에서 중장기 대응 전략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암모니아 역시 중동 변수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의 암모니아 수입은 인도네시아 비중이 43.6%로 가장 크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의존도도 38.6%에 달해 중동 리스크의 직접 영향권에 들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다만 남해화학, 롯데정밀화학 등 국내 생산기지와 일부 비(非)중동 수입선이 존재해, 단기적으로 공정이 즉각 중단될 위험보다는 수급 안정적 관리가 관건인 품목으로 분류됐다.
진실 한국무역협회 선임연구위원은 “이번 중동발 충격은 산지 집중과 해상 물류 병목이 결합한 구조적 공급 충격으로, 단순한 수입선 다변화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불가항력적 상황에서는 계약보다 실제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장기계약 위주의 조달에서 벗어나 실물 확보형 조달체계로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진 선임연구위원은 또 “고유가와 공급망 단절 상황에서도 생산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산업 구조 자체를 바꾸는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며 “핵심 공정은 회수·재사용이 가능한 자립형 공정으로 전환하고, 에너지 자립 관련 기술을 국가 안보 차원의 필수 기술로 지정해 집중 지원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중동발 위기가 반복되는 현실에서, 헬륨과 브롬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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