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오르반 총리의 16년 집권이 끝났다. "선거 독재"로 비판받아 온 체제는 무너졌고 45세의 전 여당 인사가 헝가리 유권자 다수를 설득해 승리를 거뒀다.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페테르 머저르 티서당 대표는 헝가리 다뉴브강 옆 광장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우리가 해냈다"며 "우리가 함께 헝가리 정권을 전복했다"고 말했다. 광장 맞은편에는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잠정 결과(개표율 98%)에 따르면 신생정당인 티서당은 무려 138석 확보가 유력하며, 오르반의 피데스 당은 55석, 극우 정당인 '우리 조국(Our Homeland)' 당은 6석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압승으로 머저르는 오르반의 국내 정책을 뒤집는 데 그치지 않고, 헝가리의 대외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게 됐다.
오르반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선거 막판에는 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직접 헝가리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가까운 관계를 이어왔고, 유럽연합(EU)과 우크라이나에는 큰 부담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반면 머저르는 러시아와 거리를 두고, EU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보다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머저르는 지난 2년 동안 마을과 광장, 도시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급성장하는 세력을 확산시켰고, 부패와 정경유착에 염증을 느낀 헝가리인들을 결집시켰다.
사상 최고인 79.5%의 총선 투표율을 기록한 현지시간 12일 밤, 그는 "민주 헝가리 역사상 이렇게 많은 국민이 투표한 적은 없었다"며 "어느 단일 정당도 이렇게 강력히 국민으로부터의 위임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르반 체제는 4회 연속 선거 승리와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통해 구축됐지만, 장기 집권이 순식간에 끝난 것이 확실해졌다.
다뉴브강 변 광장에서 머저르의 지지자들이 기대 속에 기다리는 동안, 머저르 대표는 페이스북에 놀라운 메시지를 올렸다. "빅토르 오르반이 방금 전화로 우리의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아직 결과를 소화할 겨를도 없었고, 당시 개표는 30% 남짓 이뤄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오르반이 강 맞은편의 한 컨퍼런스센터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곁에는 침울한 표정의 피데스 당 동료들이 있었다.
오르반은 자신을 지지한 약 250만 명의 지지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선거 결과는 명확하고 고통스럽다"고 전하며 "앞으로의 시간은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머저르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 소식이 퍼져나갔고, 선거 캠프로 사용되던 인근 호텔에서는 티서당의 활동가들이 서로를 껴안았다.
머저르는 오르반 시대에 바뀐 교육과 보건 정책을 되돌리고, 부패 척결, 사법부 독립 회복, 그리고 당 충성 인사들을 부유하게 하겠다고 약속하며 국가 자원을 낭비하도록 도운 것으로 비판받는 NER 후원 체제를 폐지하겠다고도 덧붙였다.
이러한 헌법 개정을 위해서는 3분의 2에 해당하는 133석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티서 당이 138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머저르는 지지자들에게 정권 교체를 준비하라고 말해왔고, 그것이 현실이 되자 진정한 축제가 시작됐다. 부다페스트 곳곳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렸고, 여성들은 선루프 밖으로 헝가리 국기를 흔들었다.
머저르를 지지한 이들 중 상당수는 그의 기존 지지층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오르반을 지지해 왔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그를 무너뜨렸다.
변호사 아그네스는 BBC에 "그가 (지도자로) 확실한 사람이라고 말할 순 없다"며 "하지만 우리(헝가리)는 더 나은 무언가를 희망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는 그것을 약속했고, 우리는 그의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머저르가 주목하고 있는 또 다른 대상은 친오르반 성향의 국영 언론이다. M1 TV 채널은 지금까지 당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보도를 이어왔으며, 한때 독립적이었던 웹사이트들 역시 시간이 지나며 피데스 측 세력에 넘어갔다.
M1은 이후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M1은 머저르가 투표 종료 직후 했던 연설을 재방송했지만, 당시 그는 이미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미 머저르가 승리한 뒤라 연설은 시의성을 잃었다.
헝가리는 한동안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는 듯 보였다. 한쪽에서는 오르반이 지지자들과 TV 시청자들에게 승리를 확신하며 4년 더 집권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친정부 성향 여론조사기관들도 12일 저녁까지 피데스 당의 승리를 예측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머저르가 가는 곳마다 큰 인파를 끌어모았고, 신뢰받는 여론조사기관들은 그의 지지율이 오르반을 앞선다고 보도했다.
12일 밤, 이 두 세계는 충돌했고, 오직 하나만이 현실이었다.
머저르는 당 동료들과 함께 군중 사이를 천천히 지나 무대에 올랐다.
그는 "여러분은 오늘 기적을 만들어냈다"며 "헝가리는 오늘 역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리아-리아-헝가리아!"를 외쳤다.
머저르는 이번 선거 승리를 1848년 헝가리 혁명과 1956년 소련 점령에 맞선 봉기에 비유했다.
한때 오르반도 소련 점령에 맞서 목소리를 냈던 인물이었지만, 그는 푸틴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됐고, 값싼 러시아산 석유와 연료를 정당화하며 러시아 의존 탈피를 시도해 온 EU 내에서 비인기 지도자가 됐다. 오르반은 또 우크라이나에 900억 유로(약 156조원)의 대출을 제공하기로 한 EU 합의를 번복하기도 했다.
머저르의 지지자들은 "러시아인은 떠나라!"라고 외쳤고, 차기 헝가리 총리는 EU와 관계 개선을 약속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머저르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장 먼저 축하한 유럽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헝가리어로 "루스키크 하자(러시아는 떠나라)"라고 덧붙였다.
머저르 대표는 총리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지를 폴란드 바르샤바로 정하겠다고 약속하며 헝가리와 폴란드의 1000년 우정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유럽연합 본부를 방문해 부패 대응과 사법부 독립 유지 실패로 동결된 최대 170억 유로(약 29조6000억원)의 EU 자금을 해제하도록 유럽위원회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다.
머저르는 하루 최대 7번의 연설을 소화하는 등 장기 유세를 통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군중을 결집시키며 상승세를 이어왔다.
반면 그의 경쟁자는 11일 저녁, 마지막 유세 연설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다가올 일을 알고 있는 듯했다.
현재 62세가 된 오르반은 당 대표직에서 사임하지 않았으며, 그가 없는 피데스당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당분간 그는 헝가리를 계속 이끌며 자신과 당의 상처를 추스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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