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이 낮아서 차였다”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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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이 낮아서 차였다”는 거짓말

나만아는상담소 2026-04-13 18:48:03 신고

“너는 저프였어.”

재회 관련 글을 읽다 보면 이 말을 만나게 된다. 처음엔 뭔 소린가 싶다. 읽다 보면 감이 잡힌다. 고프레임은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진 쪽, 저프레임은 끌려다니는 쪽.

이별을 당했으면 저프. 프레임이 낮았기 때문에 차인 거라고. 관계의 원인과 결과가 이 한 단어로 정리된다.

정리되는 순간 기분이 이상해진다. 자책과 안도가 동시에 온다. “아, 내가 저프였구나.” 원인을 알았으니 고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프레임을 올리면 돌아오겠지. 그래서 칼럼을 더 읽는다. 고프가 되는 법, 프레임을 올리는 대화법, 상대의 프레임을 읽는 기술. 빠져든다.

여기서 멈추고 한 가지만 확인하자. “프레임”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온 건지.


도둑맞은 단어

프레임이라는 개념을 학술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다(Goffman, 1974, Frame Analysis). 고프먼이 말한 프레임은 “사람들이 상황을 이해하는 해석의 틀”이다.

같은 상황을 누구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누구는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이유, 그 해석의 차이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여기에 “높다” “낮다”는 없다. 이기고 지는 것도 없다.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개념이다.

재회상담 업체들이 이 단어를 가져다 쓰면서 의미가 완전히 바뀌었다. 관계를 해석하는 틀이 아니라 관계 안의 서열이 됐다. 고프면 위, 저프면 아래. 위에 있으면 주도하고, 아래에 있으면 끌려간다.

학술 용어의 권위를 빌려온 건데, 정작 그 용어의 원래 뜻과는 반대 방향으로 쓰고 있다.

“프레임이 낮아서 차였다”는 문장은 심리학에서도, 사회학에서도 성립하지 않는 문장이다.


관계는 서열이 아니다

프레임 이론이 전제하는 건 이거다. 연애는 주도권 싸움이고, 주도권을 잡은 쪽이 관계를 지배한다. 이 전제가 맞는지를 40년간 부부와 커플을 관찰한 사람이 있다.

존 가트먼은 워싱턴 대학에서 커플의 대화를 비디오로 촬영하고, 심박수, 피부 전도도, 표정 변화까지 측정하면서 “어떤 커플이 헤어지고 어떤 커플이 유지되는가”를 추적했다. 수천 쌍의 데이터에서 나온 결론은 “주도권”과 관련이 없었다.

관계를 망가뜨리는 건 네 가지였다. 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 가트먼은 이걸 “네 기수”라고 불렀다. 상대의 성격을 공격하는 비난, 상대를 깔보는 경멸,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방어, 대화 자체를 차단하는 담쌓기. 이 네 가지가 반복되면 관계는 끝난다.

반대로 관계를 유지하는 커플에게서 나타난 건 “수리 시도”였다. 갈등 중에 “잠깐, 내가 좀 심했다” “다시 얘기하자” 같은 시도를 하고, 상대가 그 시도를 받아주는 것. 주도권을 잡는 게 아니라 감정의 온도를 함께 조절하는 거다.

가트먼의 연구 어디에도 “프레임이 높은 쪽이 관계를 유지한다”는 결론은 없다. 관계의 생존을 결정하는 건 누가 위에 있느냐가 아니라,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다.


“프레임을 올려라”가 당신에게 하는 일

프레임 이론을 믿으면 연애가 줄세우기가 된다. 모든 상호작용에서 “지금 내가 위인가 아래인가”를 계산하게 된다.

상대가 답장을 늦게 했다. “프레임을 잡으려는 거야.” 내가 먼저 연락했다. “저프 행동이었나.” 상대가 데이트 장소를 정했다. “고프 맞네.” 밥을 내가 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전술을 읽고 있는 거다.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가 점수판 위의 숫자가 된다.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경기를 하고 있는 거다.

데시와 라이언의 자기결정이론에 따르면 사람이 관계에서 필요로 하는 건 세 가지다. 자율성, 유능감, 유대감(Deci & Ryan, 1985).

  • - “내가 이 관계에서 나답게 행동할 수 있는가.”
  • - “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가.”
  • - “진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는가.”

“주도권”은 이 세 가지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주도권은 자율성과 다르다. 자율성은 나답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이고, 주도권은 상대를 내 뜻대로 움직이려는 통제다. 방향이 반대다.

프레임을 올리겠다고 쿨한 척을 하면 자율성이 줄어든다. 느끼는 감정과 다른 감정을 연기하고 있으니까. 상대의 반응으로 내 점수를 매기면 유능감이 줄어든다.

잘한 건지 못한 건지를 상대의 태도가 결정하니까. 전술적으로 행동하면 유대감이 줄어든다. 진짜 나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계산된 나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프레임을 올리려고 노력할수록 관계에서 필요한 것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저프라는 진단이 자책을 먹고 자라는 구조

“프레임이 낮아서 차였다”는 문장의 진짜 문제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다는 거다.

이별을 당한 사람은 이미 자존감이 바닥에 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를 수백 번 되뇌고 있는 상태다. 거기에 “저프였으니까”라는 답이 주어지면, 자책에 이름이 붙는다. 이름이 붙으면 더 선명해진다. “맞아, 나는 저프였어. 너무 매달렸어. 너무 좋아한 티를 냈어.”

좋아한 티를 낸 게 이별의 원인이 되는 세계.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게 패배가 되는 세계. 이 세계관 안에서는 진심을 보일수록 지는 거다. 상대를 좋아할수록 불리해지는 거다. 이게 건강한 관계를 설명하는 틀인지는 잠깐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온다.

이별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서로의 기대가 달랐을 수도 있고, 타이밍이 안 맞았을 수도 있고, 상대의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 복잡한 이유를 “프레임이 낮았으니까”로 환원하면, 이해한 것 같은 착각이 생긴다. 착각 위에 세운 해결책이 “프레임을 올리자”다. 원인 파악이 틀렸으니 해결책도 틀릴 수밖에 없다.


점수판을 치우면 보이는 것

프레임 이론을 버리면 남는 게 뭘까.

  • - “나는 이 관계에서 나답게 행동했는가.”
  • - “상대의 감정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 - “갈등이 생겼을 때 대화를 시도했는가, 담을 쌓았는가.”

이런 질문들이 남는다. 이 질문들은 프레임 이론의 질문과 다르다. “내가 위였는가 아래였는가”를 묻는 게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묻는다.

이별 후에 돌아볼 게 있다면 프레임의 높낮이가 아니다. 상대가 힘들다고 말했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갈등 상황에서 비난이 먼저 나왔는지 이해가 먼저 나왔는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했는지 상대가 듣고 싶어할 말을 계산했는지.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는 게, “프레임을 올리겠다”는 전략보다 관계를 이해하는 데 훨씬 가깝다.

좋아한 티를 냈다고 진 게 아니다. 진심을 보였다고 약한 게 아니다. 이별의 원인을 “프레임”이라는 한 단어에 담을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관계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이 전부 가려진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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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진 소장 저 | 북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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