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테라팹 프로젝트가 불러올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서막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테슬라와 xAI(엑스AI), 스페이스X의 역량을 총집결한 초대형 반도체 생산 기지 ‘테라팹(Terafab)’ 건설을 공식화했다. 전 세계 인공지능(AI) 연산량의 50배에 달하는 1테라와트(TW)급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머스크의 이번 발표에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도 전례 없는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지구 전력망 한계 넘는 ‘1TW’ 구상
머스크 CEO가 제시한 테라팹의 핵심은 단순한 규모의 확대가 아닌, 전력과 인프라의 한계를 넘어 인공지능(AI) 연산 능력을 획기적으로 늘리겠다는 점에 있다. 테라팹의 규모는 기존 반도체 공장의 규모를 훨씬 벗어나는데, 월 100만 장의 웨이퍼 생산 능력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10배에 달한다. 연산 능력으로 환산하면 테라팹의 목표인 1TW는 현재 전 세계 AI 연간 연산량(약 20GW)의 50배를 상회하는 압도적 수치다.
주목할 부분은 막대한 컴퓨팅 파워의 80%가 지상이 아닌 ‘우주 애플리케이션’에 배정된다는 대목이다. 머스크는 지구 전력망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대규모 AI 컴퓨팅의 지상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스페이스X의 스타링크 체계와 결합한 우주 기반 AI 데이터센터 시대를 예고한 것으로, 반도체 수요의 패러다임이 ‘우주’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그는 ‘테라와트(TW) 시대’를 넘어 1,000배 규모인 ‘페타와트(PW) 시대’ 구상도 언급했다. 달에 전진 기지와 공장을 건설해 핵심 AI 칩을 생산하고, 태양광 패널이나 구조물은 달 자원을 활용해 현지에서 제작한 뒤 이를 기반으로 한 ‘우주 데이터센터’를 궤도에 띄우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머스크는 통합 장치 제조업체(IDM) 모델을 채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텍사스주 오스틴에 위치할 테라팹을 단순히 칩을 찍어내는 공장으로 삼는 게 아닌 셈이다. 로직과 메모리, 패키징은 물론 리소그래피와 마스크 수정 제작까지 한 장소에서 처리하는 ‘올인원’ 시스템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설계 반복 속도를 기존 대비 10배 이상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운영 구조는 계열사 간 역할 분담 형태로 설계되어 xAI는 AI 클러스터 제어를 담당하고, 테슬라는 칩 설계와 제조를 맡는다. 스페이스X는 우주 운송과 태양광 기반 전력 확보을 지원한다.
머스크는 테라팹에서 생산된 칩을 테슬라 자율주행차와 옵티머스 휴머노이드 로봇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스페이스X가 추진 중인 AI 연산용 위성 등 우주 산업에 필요한 특수 반도체도 직접 생산할 방침이다. 방사선과 고에너지 입자가 쏟아지는 환경에서도 버티도록 설계해 말 그대로 ‘우주 생존형 반도체’다.
테라팹 추진의 배경에는 인공지능 시대의 병목으로 지목되는 ‘칩 부족’ 문제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급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TSMC, 마이크론 같은 기존 반도체 기업들이 아무리 생산을 늘려도, 그가 구상하는 AI와 로봇, 그리고 우주 프로젝트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이다. 테슬라는 현재 TSMC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공정을 통해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는데데, 머스크는 사업이 로봇과 자율주행, AI 중심으로 확대되면서 기존 파운드리만으로 회사의 반도체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반도체 업계가 증산에 나서고 있지만 필요한 수준을 따라잡기엔 속도가 너무 느리다”며 “휴머노이드 로봇 수요만 해도 장기적으로 연간 수십억 대에 이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테라팹을 건설하지 않으면 칩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며 “칩이 필요하기 때문에 테라팹을 건설한다”고 강조했다.
머스크가 ‘반도체’ 이야기를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테슬라는 2016년 칩 설계 전문가 짐 켈러를 영입하며 칩 자체 설계에 본격적으로 나선 바 있다. 그 결과 2019년 자체 설계한 완전자율주행(FSD) 칩을 양산 차량에 탑재하며 엔비디아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AI 학습용 슈퍼컴퓨터 도조(Dojo), 차세대 FSD 칩까지 핵심 반도체를 직접 설계해왔다. 지난해에는 삼성전자와 165억 달러 규모의 AI 칩 공급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테슬라가 설계한 차세대 자율주행용칩(AI5)과 데이터센터용 AI 연산 칩(A16)을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정으로 생산하는 계약이다. 이는 반도체 수요가 자동차를 넘어 로봇과 데이터센터까지 빠르게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풀이된다.
현실성 없다는 지적 속 시장 기대는 긍정
하지만 업계의 시선은 냉정하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번스타인은 테라팹 구현에 약 5조~13조 달러의 자본 지출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테슬라의 올해 자본 지출 계획이 200억 달러 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규모다.
무엇보다 테슬라는 반도체 설계 경험은 있지만, 2나노 공정 등 첨단 제조 경험은 없다. 첨단 공정에 필요한 장비 역시 전 세계적으로 공급이 제한적이라 현재도 테슬라는 칩을 설계한 뒤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에 생산을 맡기고 있다. 반도체 공장을 짓기 위해서는 통상 수백억 달러 규모의 투자와 복잡한 장비 공급망이 필요하고, 공장이 완벽히 가동되려면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탓이다. 반도체 전문 사이트인 세미위키의 설립자이자 반도체 전문가 다니엘 네니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들도 30년 넘게 공정을 다듬어 왔다”며 머스크가 정해진 시간내에 성공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기술적 난제는 있지만 시도만으로도 반도체 공급망에 강력한 충격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트리오리엔트 리서치의 댄 나이스테트는 “테라팹이 수십년간 이어온 반도체 분업화(설계와 생산 분리) 흐름을 뒤집는 수직 계열화로의 회귀로 테슬라만의 하드웨어 스택을 최적화하기 위해 현재 시점에서 필요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시장은 머스크의 파격적인 구상에 기대를 거는 모습이다. 테라팹 프로젝트 발표 직후인 23일(현지시간) 테슬라 주가는 전장 대비 3.50% 상승하기도 했다.
한편 테라팹의 등장은 고급 반도체 인재를 대거 끌어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글로벌 인재 쟁탈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면 기존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는 불편한 경쟁자가 늘어나는 형국이 된다. 이처럼 머스크가 공급망 대체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속도 차이를 이유로 내재화를 추진하는 만큼 결국은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크다. 미국 투자은행 번스타인(Bernstein)은 1TW 규모의 연산 능력을 확보하려면 매월 최대 1,800만 장의 웨이퍼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테슬라가 이 중 일부라도 자급자족에 성공한다면 HBM 및 범용 메모리 시장 점유율에 직접적인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모건스탠리 역시 테라팹을 머스크 생애 가장 어려운 도전으로 평가하면서도, 테슬라가 로봇용 칩 등 연간 2억 개 이상의 수요를 자급할 시 기존 파운드리 시장을 직접적으로 잠식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업계에서는 테라팹 건설에 따른 ‘낙수효과’도 주목하는 분위기다. 테슬라가 인프라, 모듈, 공급망 관련 인력 공고를 시작하며 프로젝트 검토에 착수한 만큼, 텍사스 지역에 생산 거점을 가졌거나 해외 파운드리 투자 경험이 풍부한 국내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에 기회가 돌아갈 가능성이 커서다. 특히 테라팹이 지향하는 ‘한 장소 전 공정 처리’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극자외선(EUV) 노광 관련 장비와 마스크 제작 기술력을 갖춘 파트너 기업이 필수적이다.
관건은 ‘속도’와 ‘기술력’이다. 머스크가 지적한 ‘느린 속도’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기존 기업들이 공정 효율화와 양산 속도 제고를 통해 극복한다면, 테슬라가 자체 팹을 갖추더라도 ‘경쟁자’인 동시에 ‘영원한 고객’으로 남을 수밖에 없어서다. 전기차는 팔리지 않는다는 회의론을 테슬라로 뒤집고, 민간 로켓 시대를 스페이스X로 열었던 머스크의 새로운 승부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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