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살아가고, 실천하는 예술” 경기도미술관 20주년 ‘흐르고 쌓이는’ [전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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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살아가고, 실천하는 예술” 경기도미술관 20주년 ‘흐르고 쌓이는’ [전시리뷰]

경기일보 2026-04-12 14:56:1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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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미술관 개관 20주년 특별기획전 ‘흐르고 쌓이는’ 전경. 마지막 섹션에는 민중미술이라고 불리는 리얼리즘의 계보 속 김정헌의 작품 세계를 통해 예술가 시민의 정체성을 갖고,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드러나 있다. 이나경기자
경기도미술관 개관 20주년 특별기획전 ‘흐르고 쌓이는’ 전경. 마지막 섹션에는 민중미술이라고 불리는 리얼리즘의 계보 속 김정헌의 작품 세계를 통해 예술가 시민의 정체성을 갖고,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드러나 있다. 이나경기자

 

예술은 한 시대를 어떻게 지나가며, 무엇을 남기는가. 우리는 그 흔적을 통해 무엇을 다시 읽어낼 수 있는가. 경기도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특별기획전 ‘흐르고 쌓이는’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파도에 실려온 모래가 켜켜이 쌓여 언덕을 이루듯, 한 아이가 자라나 성인이 되는 긴 세월, 예술가와 함께 시대를 지나온 작품과 이를 향유해온 관람객의 시간이 전시에 담겼다.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미술관이 지난달 26일부터 6월14일까지 개최하는 이번 전시는 회화·설치·영상 등 125점의 소장품으로 구성된다. 미술관의 20년 발자취가 담긴 작품엔 시대의 사회적 맥락과 함께, 예술이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고 실천돼 왔는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 질문은 관람객 각자의 삶 속으로 이어진다.

 

■ 소장품을 다시 읽는 방식, ‘정답 없는 질문’

 

유영국 작가의 1997년 작품 ‘산’. 이나경기자
유영국 작가의 1997년 작품 ‘산’. 이나경기자

 

전시는 ▲‘예술은 ( ) 시작하는가’ ▲‘우리는 ( ) 살아가는가’ ▲‘우리는 ( ) 기억하는가’ ▲‘예술은 ( ) 함께하는가’ ▲‘나는 ( ) 실천하는가’라는 다섯 개의 질문으로 구성된다. 괄호는 비어 있다. 전시는 답을 제시하기보다, 관람객이 각자의 언어로 질문을 완성하도록 유도한다.

 

첫 번째 섹션 ‘예술은 ( ) 시작하는가’는 예술의 근원을 묻는다. 예술은 때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생각해본 적 없던 질문을 던지며 시각을 확장한다. 첫 번째 섹션은 장르와 형식을 해체하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을 소개한다.

 

한국 추상미술을 선도한 유영국의 ‘산’은 자연을 재현하는 대신 색과 형태의 질서로 환원하며,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기초를 형성한 작업이다. 한국 1세대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의 ‘무제’는 자연과 기술, 물질과 이미지가 교차하는 지점을 탐색하며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연다. 여러 겹의 천 조각을 거칠게 바느질로 엮어낸 구본창의 ‘태초에’ 시리즈는 인간의 고뇌와 삶의 흔적, 존재의 번뇌를 물질로 드러낸다.

 

두 번째 섹션 ‘우리는 ( ) 살아가는가’는 발 딛고 서 있는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노동의 현장과 사회의 단면을 포착하며 삶의 조건을 드러낸다. 1980년대 민중예술에서 빼놓고 논할 수 없는 민정기는 산업화 시기 노동과 일상의 풍경을 판화로 기록해온 작가로, 반복되는 노동의 몸짓 속에서 사회 구조를 읽어낸다.

 

그런가하면 박은태는 ‘녹색모듈’에서 금속노동자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획일화된 회로 시스템 속에서 부품처럼 기능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배영환의 작업은 욕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현대인의 내면을 드러낸다.

 

■ 기억을 불러내는 예술, 사라지지 않는 목소리

 

조동환, 조해준 작가의 ‘미군과 아버지’. 한 장씩 일기장을 넘기듯 담긴 개인의 이야기는 시대를 관통한다. 이나경기자
조동환, 조해준 작가의 ‘미군과 아버지’. 한 장씩 일기장을 넘기듯 담긴 개인의 이야기는 시대를 관통한다. 이나경기자
안규철 작가의 2016년 작품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읽기’가 이번 전시 공간에 재해석됐다. 이나경기자
안규철 작가의 2016년 작품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읽기’가 이번 전시 공간에 재해석됐다. 이나경기자
이건용 작가의 1975년 작품 ‘동일면적’. 이나경기자
이건용 작가의 1975년 작품 ‘동일면적’. 이나경기자

 

세 번째 섹션 ‘우리는 ( ) 기억하는가’는 예술이 잊혀지는 것들을 다시 소환하는 역할에 주목한다. 함께 나누는 기억은 흩어진 것을 모으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드러낸다. 무엇이 잊혀가고 있는지,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강요배의 ‘황파’는 1990년대 제주 민중의 거친 삶을 역동적으로 담아내며 집단적 기억을 환기하고, 조동환·조해준의 ‘미군과 아버지’는 개인의 미시적 서사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교차시킨다.

 

안규철의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읽기’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세월호 2주기, 미술관에서 진행했던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로 기억이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함께 감각하고 이어가는 행위임을 드러낸다. 어느 아이의 방을 옮겨온 듯한 침대에서 관람객들이 책을 읽어주던 목소리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공감을 전한다.

 

네 번째 섹션 ‘예술은 ( ) 함께하는가’는 예술을 관계와 실천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경기도미술관은 국공립 미술관 최초로 퍼포먼스를 소장한 기관으로, 이건용의 ‘동일면적’은 그 상징적 사례다. 전시장에는 1975년 백록화랑 ‘오늘의 방법’ 영상과 행위 개념서, 그리고 도구의 흔적은 퍼포먼스를 기록이 아닌 실행 가능한 개념으로 남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를 관람객 참여로 재구성해 예술이 현재진행형의 행위로 이어지도록 한다.

 

■ 예술은 사회에, 세상에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는가

 

잡초를 주제로 펼쳐진 김정헌 작가의 작품들. 이나경기자
잡초를 주제로 펼쳐진 김정헌 작가의 작품들. 이나경기자
1990년대 국가의 풍경을 그려낸 김정헌의 작품들. 이나경기자
1990년대 국가의 풍경을 그려낸 김정헌의 작품들. 이나경기자
김정헌 작가의 작품 ‘어쩌다보니 나 너', ‘어쩔 수 없이 너 나’(오른쪽) 등으로 전시는 마무리된다. 이나경기자
김정헌 작가의 작품 ‘어쩌다보니 나 너', ‘어쩔 수 없이 너 나’(오른쪽) 등으로 전시는 마무리된다. 이나경기자

 

마지막 섹션 ‘나는 ( ) 실천하는가’는 이번 전시의 문제의식을 한 인물의 삶으로 압축한다. 민중미술 작가 김정헌은 19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며, 예술가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현실에 개입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는 자본과 권력의 흐름 속에서 주변화된 민중, 노동과 일상, 변두리의 삶에 주목하며 예술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이어왔다.

 

그의 작업 세계에는 ‘잡’이라는 단어에 대한 사유가 스며 있다. 흔히 ‘잡스럽다’고 여겨지던 것들, 잡초처럼 눈길에서 비켜나 있던 존재들에 대한 관심은 중심에서 벗어난 삶의 가치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시선은 예술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해왔는지를 되묻는다.

 

그의 작업은 ‘큰 그림’에서 ‘작은 그림’, 그리고 ‘영매로서의 미술’로 이어지며 시대 변화 속에서 예술의 역할과 소통 방식을 확장해왔다. 1980년대 ‘큰 그림’이 현실로 나아가 사회와 직접 마주하는 예술을 의미했다면, 1990년대 ‘작은 그림’은 개인의 미시적 서사와 새로운 관객과의 소통에 주목한다. 이후 ‘영매로서의 미술’은 보이지 않던 가치와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확장되며, 예술이 사회를 감각하고 연결하는 또 하나의 통로로 기능하게 된다. 마지막 작품 ‘어쩔 수 없이 너 나’ 작품은 그의 고민이 떨어질 수 없는 공동체로 귀결됨을 드러낸다.

 

지난 2024년 경기도미술관에 54점의 작품을 기증한 그의 행위 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 놓인다. 나기현 학예연구사는 “예술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고민해왔을 때, 김정헌의 삶이 하나의 답처럼 다가왔다”고 설명한다. 한 예술가의 실천을 조명하는 동시에, 관람객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 ) 실천하는가’라는 이번 전시의 마지막 물음은 관람객 각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전승보 경기도미술관장은 “교과서 명품전이 정해진 해석을 전달하는 데 그친다면, 이번 전시는 시간이 쌓이며 재해석되는 살아있는 소장품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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