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무비에 유독 '침체'라는 단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계절이었다.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온 극장가는 좀처럼 온기를 되찾지 못했고, 한국 영화계는 스스로의 회복력을 의심해야 하는 낯선 국면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올봄, 칸이 발표한 라인업은 그 모든 우려를 단숨에 불식시킨다. 박찬욱이 심사위원장이라는 상징적 권좌에 오르고, 나홍진이 마침내 경쟁 부문의 문턱을 넘었으며, 연상호가 10년 만에 자신의 장르적 고향과도 같은 미드나잇 무대로 귀환했다. 한국 영화는, 여전히 가장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박찬욱, 한국인 최초 칸의 '수장'이 되다
가장 먼저 주목할 인물은 단연 거장 박찬욱이다. 그는 올해 칸 영화제의 얼굴이자 권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됐다. 한국 영화인으로서는 최초이며, 아시아 감독으로서도 2006년 왕가위 감독 이후 20년 만에 거둔 기념비적인 성취다.
이미 〈올드보이〉,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을 통해 칸의 미학적 총애를 받아온 그가, 이제는 출품작을 평가받는 위치를 넘어 황금종려상의 주인을 결정하는 심사위원단의 수장으로 나선다. 칸 조직위원회가 "박 감독의 독창성과 시각적 완성도, 기묘한 운명을 지닌 인물들의 복합적인 내면을 포착하는 감각을 기릴 수 있어 기쁘다"고 헌사를 보낸 만큼, 그의 심미안이 올해 전 세계 영화계에 어떤 이정표를 제시할지 이목이 쏠리고 있다.
나홍진의 집념, 마침내 '경쟁 부문'의 벽을 허물다
나홍진의 필모그래피는 그 자체로 하나의 흥미로운 역설이다. 〈추격자〉, 〈황해〉, 〈곡성〉 등 장편 연출작 전편이 칸의 부름을 받은 독보적인 감독이지만, 정작 영화제의 꽃이라 불리는 '경쟁 부문'만큼은 그를 비켜갔던 터. 이 기묘한 공백이 올해 드디어 채워진다. 신작 〈호프〉가 공식 경쟁 부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무대는 비무장지대 호포항, 사건의 발단은 믿기 어려운 '호랑이 출현'이다. 현실의 비릿함과 신화적 상상력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나홍진 특유의 세계관은 이번에도 스크린을 압도할 것으로 보인다. 현장에서는 그의 연출력이 전작들을 상회하는 도약을 이뤄냈다는 고무적인 평가가 흘러나온다. 2022년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 이후 4년 만에 한국 영화가 경쟁 부문에 복귀하는 순간이기에, "분발하겠다"는 그의 짧은 다짐은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장르 마스터' 연상호, 다시 한번 미드나잇의 전율을 깨우다
칸의 밤은 늘 특별한 방식으로 소란스럽다. '미드나잇 스크리닝'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섹션은, 장르 영화만이 선사할 수 있는 날것의 흥분과 카타르시스를 위한 축제다. 그리고 올해, 그 무대의 주인공으로 연상호가 다시 호명됐다.
〈돼지의 왕〉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첫 칸 진출이라는 기록을 쓰고, 〈부산행〉으로 미드나잇 스크리닝 역대 최고의 열기를 끌어냈던 그가 10년 만에 다시 고유의 장르적 본령이라 할 수 있는 부문으로 돌아온 점은 상징적이다. 신작 〈군체〉는 봉쇄된 빌딩을 배경으로 진화하는 감염자들과 맞서는 호러 좀비물로,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이미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며 공개적인 찬사를 보냈다. 여기에 전지현, 구교환, 지창욱 등 스타 배우들이 나란히 생애 첫 칸 레드카펫을 밟게 된 점 또한 이번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관전 포인트다.
{ 세 감독의 이름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공통된 궤적이 보인다. 이들은 모두 자신만의 장르적 언어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가장 지역적인 색채로 가장 세계적인 공감을 이끌어낸 이들이다. 그 지독한 집요함이 결국 세계 영화계의 심장부를 향한 가장 강력한 통로가 된 셈이다. 칸의 봄이 다시 한국 영화의 이름으로 채워지는 지금, 이 계절이 단순한 귀환을 넘어 K-콘텐츠의 새로운 정점을 향한 시작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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