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노반장을 소장하는 게 큰 바람입니다. 보이차 애호가를 노반장을 마셔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도 되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노반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흔한 게 또 노반장이지요.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라면서 노반장을 마셔본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 건 말이 맞지 않은데 왜 그럴까요?
보이차 애호가라면 누구나 마셔보고 싶은 차의 영순위로 꼽히는 차가 노반장입니다. 노반장만 수십 종류를 소장하고 있는 분이 아직 자신은 노반장을 마셔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분 말씀이 노반장이라고 마셔보았던 차 중에 어떤 것도 글로 읽은 향미를 느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보이차의 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순정 노반장을 저도 마셔보고 싶습니다.
보이차의 왕이라고 부르는 노반장
2010년경 이전에는 고수차라는 용어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지금도 차 인구가 많지 않은데 그 당시에는 보이차를 마신다고 하면 거의 노차와 숙차였습니다. 인터넷에도 고수차에 관한 글은 거의 볼 수 없었지요. 그러던 중 2010년이 지나면서 갑자기 고수차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2015년이 되면서 고수차 바람은 광풍이라 할 정도로 보이차 시장을 휩쓸어 버렸습니다.
진승차창은 2008년에 노반장 마을과 30년 장기 합작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전에는 개인이나 소상인들이 개별적으로 찻잎을 사갔지만, 진승차창이 노반장 마을의 찻잎을 독점해 관리하면서 모료의 순도와 품질을 표준화했습니다. 진승차창의 마케팅으로 '노반장 = 보이차의 왕(茶王)'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알렸습니다. 마케팅 효과로 노반장 고수차는 단순히 맛이 좋은 차에서 부와 권위의 상징이 되어갔습니다.
때마침 중국 대륙의 자본이 투자 대상으로 보이차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보이차는 후발효라는 특성으로 생산한 해에 팔지 않아도 해가 바뀔수록 찻값이 오르는 투자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고차수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마케팅 효과가 빛을 발하면서 노반장 고수차는 산지 가격이 수십 배 이상 뛰었고 덩달아 다른 산지 고수차 가격 상승까지 견인했습니다.
노반장에 의해 고수차가 보이차 시장을 장악하기 전에는 주류가 맹해차창 등 대형 차창의 대지병배차(여러 지역 잎을 섞은 차)였지요. 그렇지만 진승차창의 성공 이후 특정 산지 고차수에서 딴 찻잎으로 만든 고수차·순료차가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값싼 차이던 보이차가 고수차로 말미암아 찻값이 산지별로 차별화되면서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랐습니다. 청나라 시절에 황실에 공차(貢茶)로 대접받았던 옛 영화를 다시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수차 시대의 기린아 2008 진승노반장
노반장과 빙도노채는 보이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마셔보고 싶은 차입니다. 워낙 찻값이 비싸니 소장하는 건 엄두를 내기 어려워 순료 고수차로 마실 기회라도 있으면 좋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어 오는 노반장 고수 순료차가 있지만 이왕이면 진승 노반장을 마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순료 노반장을 소장하고 있고 가끔 마시고 있지만 아직 진승 노반장은 접하지 못했습니다.
진승 노반장을 마시고 싶다는 제 바람이 이루어지는 날이 왔습니다. 가끔 만나서 차를 마시는 선배께서 2008 진승 노반장을 선물 받았다며 같이 마셔보자고 했거든요. 저도 고수차로 보이차의 르네상스를 일궈낸 기린아인 2008 진승 노반장을 마실 수 있는 귀한 자리를 가질 수 있으니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2008 진승 노반장의 시가는 거의 500만원 전후더군요.
찻자리에 앉은 선배의 표정을 읽자니 먼저 마셔본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차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입맛이 다르니 제게는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습니다. 찻물도 정수기 물을 쓰지 않고 경도가 낮은 우리 동네 약수터 물을 길어왔습니다. 기대가 높으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데 2008 진승 노반장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노반장의 향미를 표현하자면 첫맛은 강렬해서 묵직한 쓴맛과 떫은맛이 느껴지지만 길게 지속되지 않고 빠르게 사라집니다. 쓴맛은 곧 사라지면서 샘물처럼 달콤한 맛이 올라오는 회감(回甘) 현상이 따릅니다. 차 기운이 세지만 맑고 은은한 난꽃 향과 달콤한 밀향(꿀향)이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풍미를 냅니다. 그런데 이 차에서는 노반장 향미의 결을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차산에 가서 직접 만들어 온 2012 동경당 노반장
2008 진승 노반장에 실망하고 선배께서 가져온 두 종류의 노반장을 더 마셔 보았습니다. 이 두 종류의 노반장도 그냥 마실만한 차 정도라는데 시음 평이 일치했습니다. 익히 알려진 노반장의 향미에 근접하지 않으니 우리를 만족시킬 만한 차를 어떻게 마실 수 있을까요? 노반장이라고 이름을 붙인 차는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이름이 노반장일 뿐이니 보이차의 왕을 친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노반장을 꺼냈습니다. 이 노반장은 이제 고인이 되신 대구 동경당 님이 2012년 봄에 직접 산지에 가서 100g 소병으로 만들어 와서 제게 선물로 보내왔었습니다. 노반장 향미를 제대로 아는 분들이 이 차를 마시고 감탄했으니 선배님도 그럴 것이라 기대하며 차를 우렸습니다. 이번에 마시고 나면 5g 정도 남을 양이라 아끼고 있는데 주저하지 않고 우립니다.
차를 만든 지 14년에 드는 동경당 노반장은 지난 시간만큼 센 맛이 숙어졌으나 쓴맛은 묵직하게 유지되면서 떫은맛이 줄었습니다. 쓴맛은 짧게 사라지면서 샘솟듯 단침이 나오며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해졌습니다. 맑고 은은한 차향에 부드러운 밀향(꿀향)이 어우러지니 가히 노반장의 풍미를 가졌다고 할 만합니다. 선배님은 얼마 전에 고수차 전문가와 노반장을 마셨는데 동경당 노반장과 향미의 결이 비슷했다고 기억했습니다.
선배님이 소장하고 있는 노반장의 종류가 많지만 노반장의 향미를 가지지 못한 차라고 합니다. 2008 진승 노반장을 선물 받으면서 이제 진품을 소장하게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유명무실한 차라고 실망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귀한 차는 소장해서 내 차로 마시는 게 아니라 인연이 닿아야 마실 수 있나 봅니다. 유명무실 진승 노반장, 무명유실 동경당 노반장을 이렇게 마셔보았습니다.
노반장 고수차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모자라는 데다 특정 상인이 대량 구매를 하는 게 중국입니다. 그러다 보니 찻값은 가파르게 상승할 수밖에 없고 보통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 되어 버렸지요. 그러면 시중에 나도는 수많은 저렴한 노반장은 어떤 차일까요? 그건 고수차가 아닌 소수차이거나 늦봄 차나 곡화차(가을차), 노반장 찻잎이 조금 들어간 병배차를 노반장이라 판매하는 것일 테지요.
봄철이 되어 찻잎이 나오기 시작하면 노반장 봄차는 이미 입도선매되어 시중에 나올 물량이 없다고 합니다. 수령 100년 이상인 고차수 찻잎에 첫물차라야 고수차의 진미를 음미할 수 있을 겁니다.
노반장 고차수 다원은 390헥타르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이지만 봄차는 20t 정도 생산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노반장 봄차는 상인들이 구입하고자 하는 고수차 일순위인지라 수요에 비해 공급은 턱없이 모자랄 것입니다. 과연 노반장 봄차가 우리나라 소비자에게 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모료= 차를 만드는 데 기본이 되는 원료인 찻잎을 말한다. 산지, 수령, 채엽 시기 등에 따라 품질이 결정되며 보이차의 맛과 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여성경제신문 김정관 건축사·도반건축사사무소 대표
kahn777@hanmail.net
김정관 건축사·수필가·보이차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는 인문학 철학을 설계에 담아 50여 채의 단독주택을 지었으며 다수의 건축상을 받았다. 20년간 보이차를 즐기며 차 생활 칼럼을 각종 매체에 1000편 이상 게재해 온 전문가이기도 하다. 현재 보이차 모임 ‘다연회’ 회장으로서 20년째 다회를 운영하고 있다. ‘집은 식구들의 행복을 담는 그릇이며, 차는 대화를 부르는 매개체’라는 신념 아래 오늘도 쉼 없이 집필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혹은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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