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드]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등산의 추억이 있어.”
서울 북한산 자락에서 한국 현대 등산의 과거와 미래를 한 번에 조망하는 이색 전시가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등산·여행 콘텐츠 기획사 루트파인더스가 주관하고 BYN 블랙야크 그룹(회장 강태선)이 후원하는 이번 전시는 해방 이후 시민 등산 문화의 형성과 변화를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기획전이다. 전시는 5월 31일(일)까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주말 포함 전일 개방되며, 장소는 서울 은평구 대서문길 49에 위치한 블랙야크 베이스캠프 북한산점 2층 이벤트홀이다.
이번 전시는 “등산은 개인의 취미를 넘어 세대를 이어온 하나의 문화”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코로나19 시기 ‘100대 명산’ 프로젝트로 20·30대 등산 열풍을 이끌었던 블랙야크 관계자는 “등산이 단순한 레저가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문화라는 점을 이번 전시를 통해 느끼길 바란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전시는 크게 과거의 등산 문화를 보여주는 레트로 섹션과, 북한산·설악산·제주도 등 주요 명소별 섹션, 그리고 해외 원정 등반을 통해 미래를 조망하는 섹션으로 구성된다. 관통하는 키워드는 ‘기억’과 ‘기념’이다. 목적지를 정하고 떠나 돌아오기까지, 한 시대 시민들의 삶과 욕망이 어떻게 산행에 투영됐는지를 구체적인 물성과 기록으로 드러낸다.
핵심은 방대한 등산잡지 컬렉션이다. 인터넷 이전 시대, 등산 정보의 거의 전부는 잡지에 의존했다. 목적지와 교통편, 숙박, 코스 정보까지 모두 지면을 통해 전달됐다. 흔히 알려진 월간지 ‘산’, ‘사람과 산’ 외에도, 1961년 경북학생산악연맹이 발행한 ‘산악’, 1969년 창간 잡지 ‘등산’, 최근의 클라이밍 전문 매거진 ‘베타’까지, 그동안 잊혀졌던 30여 종의 잡지가 최초로 체계적으로 소개된다. 짧게 등장했다 사라진 제목들 하나하나가 등산 열정의 궤적을 보여준다.
여성 독자를 겨냥한 등산·여행 부록도 눈에 띈다. 여원, 여성동아, 엘레강스 등 여성잡지들은 매년 여름이면 산과 바다 여행 정보를 담은 별책 부록을 발행했다. 정윤희, 혜은이, 이영하 등 당대 스타들이 표지를 장식한 이 부록들은 당시 여성들이 어디로, 어떻게 떠났는지를 말해주는 소중한 자료다.
패션과 기념품을 통해 본 ‘산행의 시대상’도 흥미롭다. 1960~70년대 여성들 사이에서 ‘힙한’ 아이템으로 통했던 것은 명승지 뱃지를 꽂은 빨간 베레모였다. 전시장에는 실제 베레모와 함께, 이를 쓴 여성들이 밝게 웃고 있는 산행 사진들이 슬라이드쇼로 상영된다. 오늘날의 기능성 등산복과는 전혀 다른, 당시의 ‘산행 패션’을 생생히 보여준다.
지금은 잊힌 기념품 문화도 이번 전시의 중요한 축이다. 한때 산행은 가족과 지인을 위한 기념품을 사 오는 행위와 분리될 수 없었다. 명승지마다 기념품 상회가 늘어서 있었고, 등산 뱃지, 사진엽서, 키홀더와 메탈 목걸이, 페넌트, 관광 기념사진첩 등 다양한 물건이 팔렸다. 1960년대 전후 시작된 이 기념품 문화는 1970년대 절정을 맞고 1980년대부터 쇠퇴해 약 30년간 유지됐다. 오늘날 이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유행한 ‘채색칼라’ 사진엽서는 관람 포인트다. 감광 도료를 입힌 유리 건판에 흑백사진을 찍은 뒤, 전문가가 일일이 붓으로 색을 입혀 완성하는 방식이다. 전시장에는 유리 원판과 완성된 사진엽서가 함께 전시돼, 초기 컬러 이미지 제작의 과정을 한눈에 보여준다.
메탈 기념품들은 한국 경제성장의 궤적을 반영한다. 196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키홀더, 목걸이, 벽걸이형 메탈 기념품들은 1990년대로 갈수록 크기가 커지고 도안이 화려해진다. 재떨이, 필기구 등 대가족 사회를 떠올리게 하는 기념품도 함께 전시된다. 할아버지를 위한 재떨이, 조카들을 위한 학용품은 당시 가족 구조와 소비 문화를 상징한다.
전시의 메인 작품은 ‘산마다 추억이, 뱃지마다 사랑이’라는 제목의 대형 액자다. 가로 2.4m, 세로 1.6m 크기의 액자 안에 전국 명소별로 수집한 1,000여 개의 뱃지가 빼곡히 꽂혀 있다. 1960년대 전후 등장해 1970년대 절정, 1980년대 급격한 쇠퇴를 겪은 뱃지 문화의 흥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설악산과 지리산 뱃지의 시기별 분포는 등산지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설악산은 일찍부터 다양한 명소 뱃지가 쏟아졌지만, 지리산의 경우 1970년대에는 화엄사와 노고단 위주, 천왕봉 뱃지는 198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전시 기획진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병주의 ‘지리산’ 등 1980년대 문학 작품들이 지리산을 ‘이념의 산’으로 재인식하게 만든 영향이 뱃지 도안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뱃지에 독수리는 많은 반면 호랑이가 거의 없는 것도 시대를 반영한다. 대한민국을 호랑이로 상징하는 인식이 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인데, 이 시기 이미 뱃지 유행이 쇠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기획진은 “지금 새로 만든다면 호랑이 도안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설악산은 뱃지 수에서도 압도적이다. 다만 백담사를 제외하면 대부분 외설악 위주로 제작돼, 오늘날 불교 성지로 꼽히는 봉정암 뱃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내설악보다 외설악 개발이 우선됐던 현실을 반영한다. 전시는 최구현, 이기섭 등 외설악 개발에 관여한 인물들을 언급하며, 교통 여건과 개발 정책이 산행 문화에 미친 영향을 함께 짚는다.
전시 공간은 북한산을 중심 테마로도 구성됐다. 1943년 북한산을 소개한 책, 해방 후 최초의 북한산 단행본인 1958년 『북한산』 등 다양한 관점의 출판물이 전시된다. 1938년 인수봉 앞에서 촬영된 사진에는, 오늘날 ‘전면’으로 부르는 곳을 당시에는 ‘후면’으로 표기한 흔적이 남아 있다. 해방 직후까지 북한산 산행의 중심이 북한산성 쪽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943년 백운대 사진 등 희귀 사진들도 함께 선보인다.
근대 등산의 중심지였던 설악산 섹션에는 1958년 최구현이 만든 최초의 산 사진집, 1955년 해방 후 처음으로 설악산을 기록한 사진앨범이 전시된다. 이화여대 산악부 학생들이 설악산 대청봉에 오른 1955년 사진은 “한국 여성 최초의 대청봉 등정”으로 추정돼 사료적 가치가 높다. 신혼여행지이자 수학여행의 성지였던 설악산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기념품들도 일부 공개된다.
제주도 섹션은 ‘다시 오기 어려운 섬’이었던 시절의 낭만과 신비를 담은 기념품들로 꾸며졌다. 이와 함께, 이번 전시를 후원한 강태선 회장의 40대 시절 제주도 관련 기사도 소개돼, 한 산악인의 개인사가 한국 등산 산업의 성장과 어떻게 맞물렸는지를 보여준다.
전시의 말미는 미래를 향한다. 한국 산악계가 강조해 온 ‘하이킹(hiking)이 아닌, 산의 곤란성(Difficulty)과 불확실성(Uncertainty)에 맞서는 정통 근대 등산’의 정신을 조명하는 코너다. 루트파인더스가 2023년부터 운영 중인 해외 원정 후원 프로젝트 ‘오르세나’의 후원팀 18개 중 일부의 원정 사진과 기록이 액자 형태로 전시된다. 고산 등반과 해외 원정의 계보를 잇는 현재 진행형 도전들이다.
이번 전시의 성격을 함축하는 문구는 ‘소이성미(小而誠美·작은 것을 정성스럽게 대하니 아름답다)’다. 서예가 심천 이상배가 쓰고, 지산 이준엽이 지은 이 네 글자는 각 글자를 산과 사람, 기분, 호연지기를 형상화한 그림 문자로 풀어냈다. 작은 뱃지 하나, 얇은 잡지 한 권, 손바닥만 한 엽서 한 장에 깃든 정성과 시간이 모여, 한 세대의 등산 문화를 이뤘다는 메시지다.
오늘날 MZ세대에게 등산은 기능성 의류와 세련된 장비, SNS용 사진과 맛집 탐방이 결합된 라이프스타일로 소비되는 경향이 짙다. K-컬처 열풍 속에 북한산과 지방 원정 산행은 외국인 관광객의 ‘머스트 고(Must go)’ 코스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빈손으로 산을 떠난다. 전시 기획진은 “과거의 기념품 문화와 기록들을 통해, 산행이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추억을 쌓고 나누는 문화 행위였음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젊은 세대에게는 레트로 감성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통로가, 한국 등산 문화에 호기심을 가진 외국인에게는 ‘K-등산’의 뿌리와 멋을 엿볼 수 있는 창이 될 전망이다. 산을 오르내리며 쌓인 수많은 발자국과, 그 위에 얹힌 작고 소소한 물건들이 한 공간에 모여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단면을 조용히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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