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권수빈 기자] 시간의 무게를 견뎌낸 낡은 목조건물에 새하얀 한지를 새로 바르는 일은 무너진 공간을 단장하는 행위를 넘어 과거의 숨결을 현재로 조용히 이어내는 작업이다. 느리지만 옳은 전통 보존의 맥이 창덕궁 깊숙한 곳에서 이어졌다.
국가유산청과 신협중앙회는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약방에서 고건물 보수 및 정비 후원 성과공유회를 열고 그간의 작업 결과물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번 수리 작업은 창덕궁 연경당 권역을 구성하는 안채와 사랑채, 선향재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민간 기업의 자본 후원을 바탕으로 낡은 내부 도배지와 창호들을 전통한지로 전면 교체해 역사적 공간의 가치를 되살리는 데 주력했다. 이날 현장에서는 2020년부터 이어진 신협 측의 기금 조성이 거둔 실질적인 성과가 집중적으로 조명됐으며, 우리 고유의 건축 기술과 재료를 계승하는 민관 상생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최근 고궁의 원형 보존 작업은 꼼꼼한 실측을 바탕으로 한 현대 과학의 분석에 조상들의 정교한 솜씨를 재현하는 재래식 기법을 결합해 이루어진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체계화한 복원용 종이의 과학적 품질 기준을 통과한 한지를 선별한 뒤 현대의 편리한 접착 방식을 배제하고 초배, 재배, 정배로 겹겹이 이어지는 까다로운 옛 도배 절차를 철저하게 따른다.
핵심 재료로 쓰이는 전통한지는 1년생 닥나무 껍질을 천연 잿물에 삶고 방망이로 두드려 섬유질을 푼 뒤 식물성 점액질인 황촉규를 섞어 물속에서 섬유가 고르게 엉기도록 유도해 만든다. 특유의 '외발뜨기' 기술을 적용해 여러 방향으로 섬유 결이 교차하는 질기고 튼튼한 종이가 만들어진다. 이처럼 여러 번의 반복 공정을 거치면 비로소 '백지(白紙)'가 된다.
새로운 옷을 입은 건물 중 하나인 연경당 권역의 선향재(善香齋)는 '좋은 책 향기가 서린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 사대부가의 서재 격 공간이다. 서적을 보관하고 열람하는 본래의 쓰임새에 맞춰 채광과 활용을 고려한 배치로 설계됐으며, 오후 늦게 들이치는 따가운 서향 빛으로부터 귀한 책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 바깥으로 동판 차양을 내고 도르래를 이용해 목조 정자살 문짝을 위아래로 조절할 수 있도록 고안한 독창적인 구조미를 지니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일차적인 시설 정비에 머물지 않고, 복원을 마친 선향재를 대중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올 하반기에 선향재 특별관람 프로그램을 개설할 예정이다.
뉴스컬처 권수빈 ppbn0101@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