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최대 압박은 이란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이란은 더 강해졌다."
최근 뉴욕타임즈가 트럼프가 역설적으로 이란을 중동에서 의미있는 주요 국가로 만들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놓았다.
뉴욕타임즈는 최근 기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이란 정책이 역설적으로 이란을 중동의 중심 국가로 부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핵심은 트럼프가 이란 핵합의를 파기하고 제재를 강화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란은 군사·외교적 영향력을 오히려 확대하고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오바마 행정부 시절 맺었던 이란과의 핵합의 내용을 파기하고 이란의 석유 수출과 금융 거래를 제한하는 등 강력한 제제를 가했지만 이란은 우회 거래와 중국·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일부 제재를 회피했다.
제재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시리아, 레바논(헤즈볼라), 예멘(후티 반군) 등 무장 세력 지원을 강화하면서 지역 내 반미 정서를 결집시키는 역설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함께 도발한 전쟁 역시 이란의 약화를 도모하는데 실패했음이 점차 확실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했던 '최대 압박'의 역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제재가 이란 내 보수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해 '저항의 축'을 공고히 하고 있는 현실도 이제 부인할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이란을 적대국이 아니라 중요한 파트너로 만들려는 트럼프의 발언이 이어져 주변 참모는 물론 관련국들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2주간의 임시 휴전이 성사된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미국과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를 공동 징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혀 '역시 (돈만 밝히는) 트럼프'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앞서 트루스소셜에서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 정체 해소를 도울 것이다. 많은 긍정적인 조치들이 있을 것이며 큰 수익이 만들어질 것"이라고도 말했다. 트럼프는 아울러 "우리는 합작법인(joint venture) 형식으로 그것을 진행하는 것을 구상 중이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란은 재건 절차를 시작할 수 있다"고 밝혀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를 징수해 재건 비용으로 쓰겠다는 발상인데 결국 이란 재건 과정을 큰 돈벌이 기회로 삼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트럼프의 이같은 발언은 과거 가자지구가 일시적 평화를 맞이했을 때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대우는 큰 관심없이 그 곳에 엄청난 규모의 레저타운을 만들겠다는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레저타운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난해 여름 개장한 북한의 원산 갈마 해안관광지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자지구가 지중해 휴양지 밀집지역인 '라비에라'처럼 중동의 대표 휴양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모델로 갈마지구를 언급한 경우가 많았다. 더 나아가 미북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원산을 방문해 미국 기업들의 참여 여부를 저울질할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한때 유행했는데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들을 추적해보면 전혀 뜻밖의 발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트럼프에게 국제 분쟁 지역은 해결해야 할 인도적 과제가 아니라, 저평가된 '노다지 부동산'에 불과한 셈이다.
트럼프의 이같은 성향으로 보아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 문제와 이란 재건에 대하 그의 구상이 전혀 새로운 상황으로 중동문제를 변화시킬 수도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란은 이미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 수를 하루 약 15척으로 제한하고 통행료를 부과하겠다고 나섰다. 이란 측은 해협을 통과하려면 이슬람혁명수비대와 사전에 통행료를 협의하고, 지불수단은 암호화폐나 중국 위안화만 가능하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란의 이같은 행동이나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국제법상 모두 불법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국제 해협이기 때문에, 유엔 해양법협약(UNCLOS)에 따라 모든 국가 선박이 공해처럼 자유롭게 통과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세계 각국 정상들이 호르무즈해협에 발이 묶인 자국 선박과 국민을 빼내기 위한 외교전에 들어가는 등 이미 이란은 강대국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이 앞다퉈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자국 선박의 무사 통과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조현 외교부장관 역시 곧 이란에 특사를 파견할 것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쟁을 설득하면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될 것이며, 인접한 중동 국가에서 미국의 이익을 타격할 가능성은 미미하다고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댄 케인 미군 합참의장은 호르무즈 해협을 확보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며 이란이 봉쇄할 것이라고 전쟁 전에 이미 경고했다.
◇네타냐후를 구한 전쟁, 이란을 키운 제재…역설에 갇힌 중동
전후 사정으로 볼 때 네타냐후의 주장이 틀렸음이 분명한데 본인도 국내정치적 위기국면을 전쟁으로 극복했으면서 이란 역시 강경노선이 전쟁을 통해 민중봉기를 압도할만큼 역설적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급작스럽게 이스라엘 음악축제를 공격하면서 방아쇠가 당겨진 중동 전쟁은 사법개혁을 강행하며 수개월간 대규모 시위에 직면했던 네타냐후 총리를 구원해주는 역설적인 결과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2023년 초부터 대법원의 판결을 의회 단순 과반으로 뒤집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사법개혁을 추진하면서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수십만 명이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최악의 분열을 겪었었다. 네타냐후의 사법개혁은 수많은 부패혐의로 위기에 몰린 본인을 구원하기 위한 책략이었음이 분명했다.
미국과 이란이 휴전 발표 바로 다음 날인 9일(현지시간)에도 네타냐후의 이스라엘군이 레바논에 대규모 공습을 가해 전쟁의 불씨가 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다 이같은 배경 때문이다. 같은 날 이스라엘 법원 대변인은 "네타냐후 총리의 장기화한 부패 재판이 오는 일요일(12일)부터 재개된다"고 밝혔다. 이란과의 전쟁으로 선포됐던 국가 비상사태가 해제된 지 불과 몇 시간 만이다.
네타냐후는 국내의 사법개혁 반대 시위와 부패 혐의라는 정치적 위기를 전쟁으로 돌파했었고, 이란의 신정체제는 그 압박을 자양분 삼아 체제 결속과 지역 패권을 공고히 해왔다. 서로를 악마화하던 세력들이 각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적대적 공생'의 과정을 거치며, 그 사이에서 트럼프는 '재건 사업'이라는 이름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적대적 공생이 낳은 괴물, 우리는 준비되었는가
물론 이란 전쟁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휴전기한이 끝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란 전쟁 후유증은 꼭 유가 불안정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트럼프가 거듭 경고했듯이 자기를 돕지 않은 동맹국들에게 어떤 액션을 취할지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알수 없다.
만약 주한미군에 미세한 변동이라도 생긴다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기는 중동 못지 않게 커질 수도 있다.
주변 국가나 시장 참여자들이 흔히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을 기업 지배구조에서 찾곤 하지만, 사실 그 뿌리에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 즉 남북 분단과 군사적 대치라는 특수성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한국 시장을 평가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는 항목은 늘 '남북 관계'이다. 무디스 및 S&P 등 세계적인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산정할 때 반드시 '지정학적 리스크' 항목을 별도로 할당한다.
여기에다 이란 전쟁의 포성이 크게 들릴 때마다 한국 주식시장이 가장 큰 악영향을 받고 있는 것 역시 우리 에너지 수급이 지나칠 정도로 호르무즈 해협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한 축으로 작용했다. 에너지 정책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뿐 아니라 외부 에너지 의존 구조까지 함께 고려한다.
호르무즈 해협의 유료화는 단순한 중동 문제가 아니라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심화시킬 수 있는 지정학적 리스크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약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중 30%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양기욱 산업통상부 산업자원안보실장은 9일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 가 실제 징수될 경우 국내 기름값이 약 0.5% 인상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아직은 구체적인 통보나 정보가 없다는 점도 밝혔다. 어쨌든 호르무즈가 유료화될 경우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도 만만치 않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중동 원유 의존도를 향후 5년 내 50% 이하로 낮추기 위한 공격적인 수입선 다변화가 시급하다. 이와 함께 호르무즈 봉쇄와 같은 비상 상황에 대비해 현재 약 9600만 배럴(국내 수요 약 90일분) 수준인 정부 전략 비축유를 최소 120일분 이상으로 확충하여 에너지 안보의 '완충 지대'를 확보해야 한다.
한국 산업 구조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도 절실하다. 화석 연료 기반의 에너지 구조를 원자력과 재생 에너지 비중 합계 50% 이상의 저탄소 에너지 믹스로 빠르게 재편함으로써,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국내 물가와 제조 원가에 미치는 전이 효과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다.
가치와 동맹 대신 '입금'과 '배당'이 외교의 척도가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지금 당장은 미국과 이란 사이에서 균형 있는 외교를 모색하면서도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역설의 시대에 준비 없는 국가는 가장 큰 대가를 치루기 마련이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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