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에트나 활화산, 신들의 대장간에서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박재희 더봄] 에트나 활화산, 신들의 대장간에서

여성경제신문 2026-04-09 10:45:00 신고

새벽 출발이다. 눈꺼풀은 아무리 올려도 반쯤 내려와 올라가지 않았지만 에트나 화산을 오르는 날, 8시까지 미팅 포인트에 집결하기로 했으니 자는 둥 마는 둥 새벽부터 일어나 에트나 포인트를 향해 달렸다.

“케이블카 50유로, 등반투어비 60유로. 너무 비싸다."

돈 얘기는 늘 인간을 빠르게 깨운다. 화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용기와 지갑. 미 선배는 용기백배한 사람이니 늘 지갑의 문제를 지적하는 편이다.

“가이드 없이 자율 등반하면 60유로 안 내도 되는 거 아냐?” 

“가이드 없이는 등반 불가능해. 케이블카만 타고 올라갔다 내려올 거 아니잖아.”

110유로. 에트나 등반을 위해 20만원가량을 내는 것이 과하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난 살아있는 산 앞에서 그 숫자가 외려 작다고 느끼는 쪽이다.

용암과 유황가스가 끓어오르는 에트나 화산, 만년설 /사진=박재희
용암과 유황가스가 끓어오르는 에트나 화산, 만년설 /사진=박재희

에트나는 유럽에서 가장 큰 활화산이다. 높이는 약 3357m지만, 그 숫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분화가 있을 때마다 산은 조금씩 자라거나 무너진다. 말하자면 이 산은 '완성된 적이 한 번도 없는 존재'다.

최근 몇 년만 해도 2021년 2월에는 한 달 동안 17차례나 분화했고 2022년에도 수차례 용암을 뿜어냈다. 2023년 5월에는 7㎞ 높이까지 화산재를 쏘아 올려 카타니아 공항을 폐쇄시켰다. 그러니까 이 산은 관광지이기 이전에 여전히 활동 중인 괴물인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서 있는 땅이 단단한 지면이 아니라 '잠시 굳어 있는 액체'처럼 느껴진다. 발밑의 대지가 사실은 거대한 생명체의 등껍질 같은 것이라고 그리고 그 생명체가 언제든 뒤척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8시라던 출발은 9시에 가까워서야 이뤄졌다. 이미 계획은 틀어졌고 날씨도 개었다 맑았다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날씨 때문에 정상까지 올라가기는 어렵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실망보다 안도감을 느꼈다. 발목까지, 무릎까지 빠지는 화산재 구간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체력적인 자신이 없었고 또 하나, 솔직히 이 산은 오르는 대상이라기보다 허락을 받아야 하는 대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우리의 산악가이드 시모네(Simone)는 돌로미티 인근에서 태어났다. 태생적 산사람인지 운명적으로 산에 이끌리고 산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젊고 친절한 이탈리아 남자’라는 저항불가 카테고리에 들어있는 가이드는 첫눈에 든든하다. 그 어떤 불만이 있겠나. 그가 크레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 저건 지금도 움직이고 있어." 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에트나에는 300개가 넘는 분화구가 있다. 그중 일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언제든 다시 숨을 내쉴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곳을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이라고 불렀다. 대장장이 신이 이곳에서 영웅들의 무기를 벼린다고 믿었다. 제우스의 번개를 만들고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방패를 만든 곳이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 서보니 왜 그런 신화가 있는지가 몸으로 느껴진다. 이곳에는 정말 누군가가—무언가가—살고 있다. 땅 아래에서 숨 쉬고 때때로 화를 내고 가끔은 용암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무엇인가가.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를 보려는 사람들이 봉우리 능선을 걸어 오른다. /사진=박재희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를 보려는 사람들이 봉우리 능선을 걸어 오른다. /사진=박재희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뒤 검은 화산재 위를 걷기 시작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발밑은 흙이 아니라 부서진 시간 같았다. 화산재는 검고 거칠었다. 손으로 만지니 생각보다 날카롭다. 모래가 아니라 폭발의 잔해였다.

세 번쯤 미끄러졌다. 화산재에 묻혀 일어나기도 힘들었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몸을 가누기 힘든 상황은 산에서 내가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해주는 기분이다. 우리는 허락받고 걷는 것이다. 이 산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언제든 재가 될 것이다.

시모네가 크레이터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젠가는 나도 저기 재로 남을 거야."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농담이 아닌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체념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일종의 수락 같은 것. 이 산과 함께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담담함이었다.

그의 말은 에트나가 단순히 관광지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 에트나는 언제든 삶을 빼앗아갈 수 있는 존재다. 그럼에도 그들은 떠나지 않는다. 화산재가 쌓인 땅에서 포도를 키우고, 용암이 식은 땅 위에 집을 짓는다.

날씨는 헤파이스토스의 기분처럼 바뀌었다. 순간 맑았다가, 곧 흐려졌다. 햇빛이 들면 검은 화산재가 은처럼 반짝였고, 구름이 끼면 모든 것이 갑자기 사라졌다. 시야가 10m 안으로 줄어드는 순간이 있었다. 앞사람의 등이 희미해지고, 뒷사람의 목소리가 안개에 묻혔다.

순간, 나는 두려움보다 경외를 느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산은 언제, 무엇을 보여줄지 결정한다. 고개를 들면 크레이터 주변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진짜 연기. 땅속에서 올라오는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달콤하면서도 독한 냄새. 지옥의 냄새구나, 싶다. 중세 사람들이 화산을 지옥의 입구라고 믿은 이유를 알겠다.

시모네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지금은 산의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에요."

지금이 기분 좋은 날씨라고? 그렇다면 기분 나쁜 날에는 어떤 모습일까?

에트나 화산에는 300개가 넘는 분화구가 있다. /사진=박재희
에트나 화산에는 300개가 넘는 분화구가 있다. /사진=박재희

“날씨가  좋은데 정상까지 왜 못 간다는 거죠? 우리는 60유로나 내고 왔어요. 정상까지 안내해준다기에 온거라구요.” 

누군가는 더 높은 봉우리를 오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만을 토로하다가 결국 가이드와 언성을 높였다. "투어가이드면 요청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화산은 정작 조용해 보였는데 사람들 사이에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

“2023년에 에트나가 분화했을 때 용암 기둥이 500m 높이까지 치솟았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군요. 그때 이 케이블카는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시모네는 못들은 척 다른 설명을 했고 그는 설득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산이 화를 내면 인간의 계획 따위는 한순간에 의미가 없어진다.

화산재를 걸어 내려오는 건 힘들었다.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일어났다가 또 넘어졌다. 그러다가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케이블카 티켓을 흘려버린 것 같다. 왕복티켓을 잃어버렸으니 내려가는 비용은 더 내야 한단다. 티켓 없이 어떻게 왔겠냐며 검표인을 설득해 봐도 소용없다.

편도 티켓은 32유로. 거대한 화산이 수천 년 동안 분출해 온 에너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숫자지만 부주의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 속은 쓰렸지만 어쩌겠나. 산은 내려가야 하니까.

산에서 내려와서 저녁으로 돼지고기를 굽고, 와인을 마셨다. 불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가 조금 전까지 우리가 밟고 있던 땅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에트나 화산 기슭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었다더니 정말 특별하네."

화산재가 섞인 토양이 포도에 독특한 풍미를 넣어주는 것인지 미네랄 맛이 강하고, 뭔가 불에 그을린 듯한 뒷맛이 남았다.

“와인 안에 화산이 들어 있는 것 같아.”

생각해보면 우리는 같은 불을 나눠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땅속에서 끓어오르는 마그마와 식탁 위에서 고기를 굽는 불. 그 근원은 같다고 생각하니 좀더 근사한 저녁이다.

에트나를 오르는 건 체력보다 정신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균형을 잡고, 바람에 흔들리고, 안개 속을 헤맸다. 오늘의 모험은 위험한 장소에 간 것보다는 내가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지 기꺼이 인정하는 일이었다.

60만 년 동안 분출을 반복한 화산. 그 화산의 끓어오름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봤고, 로마인들도 봤고, 중세의 순례자들도 봤다. 산은 2023년에도, 2024년에도 여전히 폭발했다. 나는 그 긴 역사의 한 점에 불과하지만 하룻동안 이 산을 걸었다.

내가 사소하다는 걸 자각하면서 오히려 자유롭다는 생각이 든다. 사소함을 인정하면, 실수도 작게 느껴지고, 두려움도 가벼워진다. 케이블카 티켓을 잃어버린 것도, 끝없이 미끄러진 것도, 정상에 가지 못한 것도 모두 별일이 아니다.

뜨거운 용암과 유황가스 그리고 눈, 얼음, 화산재로 이루어진 산 /사진=박재희
뜨거운 용암과 유황가스 그리고 눈, 얼음, 화산재로 이루어진 산 /사진=박재희

시모네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나중에 언젠가는 나도 재로 남을 거야."

체념이 아닌 수용 그리고 일종의 평화. 에트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안다. 인간은 약하고, 작으며, 짧게 머무는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원처럼 오늘 하루를 산다. 화산재 위에서 포도를 키우고, 용암이 식은 땅 위에서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그래서 사소하면서 위대하다. 

에트나는 앞으로도 계속 폭발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산을 걸었다. 잠시, 허락받아, 조심스럽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보니 멀리 에트나의 정상에서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헤파이스토스는 아직 쉬지 않고 풀무질을 하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박재희 작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전공 후 국제경영 MBA를 취득했다. 현대그룹과 DELL, EMC 등 글로벌 IT 기업 마케터로 일하고 미국 벤처 Actifio 아시아태평양 지역 마케팅 총괄대표를 지냈다. 커리어의 정점에서 '인생 리셋'을 선언하고 두 차례 산티아고 순례 후 현재는 여행작가이자 자기계발 리더십 코치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 , <산티아고 어게인> , <숲에서 다시 시작하다> , <그 여자, 정치적이다> 등이 있으며 현재 모모인 컴퍼니 대표를 맡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혹은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

Copyright ⓒ 여성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