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거래소가 추진해온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공시' 참여 기업 수가 급격히 늘었지만 정작 공시 내용은 형식적 수준에 그치면서 실효성 논란이 커지고 있다. 세제 혜택과 제도 도입 효과로 외형적인 참여 확대는 이뤄졌으나 핵심인 지배구조 개선과 자본 배치 전략 등 기업가치 제고의 본질적 내용은 빠진 채 '알맹이 없는 공시'가 양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세제 혜택에 몰린 '형식적 참여'…공시 숫자만 늘었다
최근 한국거래소가 발표한 '월간 기업가치 제고 현황'에 따르면 지난달 신규 공시 기업이 409사로 집계되면서 누적 공시 기업은 587사까지 늘었다. 제도 도입 이후 가장 큰 증가폭으로, 특히 고배당기업을 중심으로 공시 참여가 급증한 것이 특징이다. 실제 신규 공시 기업 중 405사가 고배당기업인 것으로 나타났다. 세제 혜택을 계기로 공시 참여가 확대된 것으로 분석된다.
공시 기업의 시가총액 비중 역시 전체 시장의 72.2%에 달하며 외형적으로는 밸류업 정책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밸류업 지수와 관련 ETF 자금도 증가하며 시장 지표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장사들의 벨류업 공시가 양적인 면에선 늘어난 것과 달리 공시의 질적 수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특히 이번 공시가 '약식 공시' 형태로 허용되면서 기업들이 최소한의 정보만 기재하는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 밸류업 정책이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투자업계 안팎에선 이번 밸류업 공시 참여기업 급증이 정책적 유인에 따른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조세특례제한법 시행령 개정으로 고배당기업에 세제 혜택이 부여되면서 공시 제출이 사실상 '선택'이 아닌 '조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실제 2026년 4월 3일까지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제출한 고배당기업은 총 528사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신규 공시 기업만 444사로 집계됐다. 특히 코스닥 기업이 261사로 코스피(183사)를 크게 웃돌며 중소형 상장사까지 공시 참여가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참여 확대에도 불구하고 전체 상장사 대비 참여 비율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코스피 기준 약 36%, 코스닥은 약 16% 수준에 머물며 일본 등 주요 시장과 비교해 낮은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의 경우 관련 제도 도입 이후 프라임 시장 상장사의 90% 이상이 공시에 참여한 것과 대비된다.
무엇보다 공시에 담긴 내용이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미흡하거나 부실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다수 기업이 배당성향, 투자계획 등 일부 항목만 간략히 제시하는 데 그치면서 기업가치 제고의 핵심으로 꼽히는 지배구조 개선, 자본비용 인식, 리스크 관리 방안 등은 공시에서 빠진 채 공시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공시에서 "중장기적으로 주주가치를 제고하겠다",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겠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지만 자본배치 전략과 관련한 핵심 지표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잉여현금흐름 활용 기준이나 자사주 매입·소각 규모, 수익성 목표 등 투자 판단에 필요한 정보는 제시되지 않았고 주주환원과 성장을 균형 있게 고려하겠다는 수준의 원론적 설명에 머물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포스코홀딩스는 "이차전지 소재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환하겠다"고 밝혔지만 투자 대비 목표 수익률이나 설비투자 회수 계획, 주주환원 정책과의 균형 전략 등은 공시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대규모 투자 계획은 언급됐지만 자본 효율성 측면의 설명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평가다.
운송·항공 업종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한항공은 "재무구조 개선과 안정적 성장 추진"을 언급했지만 부채비율 목표나 차입금 축소 계획 등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HMM 역시 "경영 효율성 강화"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지만 민영화 이후 자본 전략이나 배당 정책에 대한 명확한 계획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주요 상장사들의 밸류업 공시 내용을 살펴보면 "강화하겠다", "확대할 계획이다",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선언형 문장이 반복됐다. 투자자들이 실제로 요구하는 수익성 목표, 자본배치 기준, 실행 시점, 리스크 대응 방안 등은 상당수 공시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면서 밸류업 공시가 기업의 실질적인 전략을 담은 문서라기보다 방향성을 설명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핵심 빠진 밸류업…지배구조·자본배치 전략 '공백'
밸류업 공시의 핵심은 단순한 배당 확대가 아니라 기업의 자본 효율성과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장기적인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있다. 그러나 현재 공시에서는 이러한 핵심 요소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배구조 관련 내용은 대부분 공시에서 빠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기업은 주주가치 훼손 논란이나 대규모 투자 리스크가 발생했는데도 관련 내용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해 대규모 유상증자 추진 과정에서 주주가치 훼손 논란이 제기됐지만 이와 관련해 리스크 요인이나 향후 자본 정책에 대한 내용이 공시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공시 가이드라인에서 권장하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본 배치 전략 역시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잉여현금흐름 활용 방안, 투자와 주주환원 간 균형, 중장기 자본배치 계획 등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핵심 정보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밸류업 정책의 취지가 '주주가치 중심 경영'에 있는 만큼 이사회 주도의 의사결정 구조와 자본비용에 대한 인식, 총주주수익률 관점의 전략 등이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공시는 이러한 요소를 의무가 아닌 권고 사항으로 두고 있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와 함께 기관투자가의 역할 부재도 한계로 지목된다. 일본의 경우 공적연금(GPIF) 등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며 기업의 공시 참여와 내용 개선을 유도한 반면 국내에서는 기관투자가의 압박이 상대적으로 미흡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밸류업 공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단순 참여 확대를 넘어 공시 내용의 질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배구조, 자본배치, 리스크 관리 등 핵심 항목을 의무화하고, 공시 이행 여부에 대한 평가와 시장 감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향후 2027년부터는 현황 진단, 목표 설정, 계획 수립, 이행 평가, 소통 방안 등을 포함한 '완결형 공시'가 요구될 예정이지만 제도보완 없이 형식적 공시가 반복될 경우 밸류업 정책 자체에 대한 신뢰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밸류업의 핵심은 배당 확대가 아니라 이사회 중심의 자본배치와 책임경영이다"며 "밸류업 공시 참여 기업 수는 늘었지만 내용 측면에서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를 경우 기업가치 제고 정책의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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