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리더의 생각]당시 반대 논리는 ‘중국 거역 불가’ 아니라 ‘부끄럽다’였다
“김 작가는 집필을 위해 방대한 사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세종이라는 인물의 천재성과 애민(愛民) 정신에 새삼 감탄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에는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이소사대(以小事大·약소국이 강대국을 섬긴다는 논리)’가 팽배했다.
명나라의 한문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은 ‘불충’이라며 반대하는 신하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 창제를 밀어붙인 원동력은 결국 백성을 향한 사랑이었다는 설명이다.” (출처: “직선 획 하나로 무한 글자…한글, 그 위대함 풀어내”, 이데일리, 2026.03.11)
이는 최근 소설 〈세종의 나라〉를 낸 작가 김진명을 인터뷰한 기사 중 일부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인 한글을 다룬 작품은 다양하게 나올수록 좋다. 그러나 핵심 사실은 훼손하면 안 된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책 중 상당수는 일부 허구를 첨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실을 왜곡한다. 그것도 과감하고 엉뚱하게 곡해한다.
다행히 훈민정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서술된 사료가 다수 있다. 그중 가장 기본이 〈조선왕조실록〉과 해설서 〈훈민정음〉이다. 우선 당시 신하들의 반대가 거셌는지 확인해본다. 〈조선왕조실록〉에 ‘훈민정음’으로 검색하면 여러 기록이 조회되는데, 반대 의견은 한 번 나온다. 널리 알려진, 최만리 집현전 부제학 등이 훈민정음 창제 후 두 달이 지난 즈음인 1444년 2월 20일(음력)에 올린 상소문이다. 이 단일 사건으로 김 작가가 주장한 ‘신하들의 거센 반대’를 뒷받침하기는 어렵다.
상소를 올린 신하들이 훈민정음을 활용함으로써 “‘명나라의 한문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은 ‘불충’”이라고 주장했나? 이런 설정은 〈세종의 나라〉에 앞서 다른 소설 〈뿌리 깊은 나무〉에서 펼쳐졌다. 이 소설에 따르면 최만리가 이끄는 한글 반대파는 물론, 세종과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한글 반포는 조선이 중화(中華)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를 선언하는 일이다. 따라서 명나라는 조선의 한글 창제와 활용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그래서 소설 속의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를 비밀리에 추진한다. 이를 눈치챈 반대파는 한글 창제를 저지함으로써 조선을 구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을 잇따라 살해하고, 세종까지도 협박한다.
◇최만리 등 “언문은 야비하고 상스러운 기예, 부끄럽다”
우리는 최만리 등의 발언을 직접 접할 수 있다. 상소문 중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구주’는 중국 전역을 가리킨다._필자)
“신라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한자와 분리된 것이 아니옵니다. (중략)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이들 발언을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 읽을 수 있다. 훈민정음에 반대한 신하들은 그것을 중화를 거스르는 큰 사건으로 인식했나? 중국은 주변 국가가 자체 문자를 만들어서 쓸 경우 그것을 중화 질서를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용납하지 않았나? 첫째 초점은 조선 내부의 인식이고, 둘째 초점은 중국의 인식이다.
둘째 질문에 대한 답이 더 간단하다. 신하들은 자체 문자를 창안해 구사하는 국가들로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을 거론했으나, 이들 국가가 그로 인해 중국의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세계사에서 식민·직접통치와 결합된 제국주의 시대를 제외하면 지배 국가가 자신과 다른 문자를 쓴다는 이유로 피지배 국가를 공격한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최만리 등 신하들도 그 정도 역사 지식은 갖고 있었다.
훈민정음 반대파는 훈민정음이 위대한 문자고 한글 창제가 큰 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화를 거스를까봐 걱정한 게 아니라 혹여 중국에 알려질 경우 부끄러운 문자라며 염려했다. 그들은 한글이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않고 야비하고 상스러우며 무익하다”고 그 이유를 들었다.
요컨대 최만리 등은 “명나라가 언문 창제를 알고 노(怒)할까 두렵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실이 중국에 들어가면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우리가 부끄러워진다고 주장했다. 독자 문자를 만들어 명나라의 심기를 크게 거슬러 나라가 위태로워질까 걱정한 게 아니라 명나라를 사모하는 우리가 심히 부끄러워진다고 토로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로 시작하는 1443년 12월 30일(음력)자 기사에서부터 ‘훈민정음’이라고 기록됐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신하들은 상소문에 이 명칭을 한번도 적지 않았다. 왕이 정한 명칭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한글을 못마땅해한 것이다.
◇상소문 정합성 위배, 세종이 정곡을 찌르다
상소문에 정합성을 위배한 대목이 있다. 그들은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소리를 나타내는 이두는 예외로 인정하면서 이두는 형태를 한문에서 따왔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과연, 세종은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을 활용하지 않느냐”고 답변했다. 이어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종의 이 발언은 ‘훈민정음 창제의 주요 목적이 한자음의 정확한 구사’라는 억측을 기각하는 증거 중 하나다. 다른 증거는 〈훈민정음〉의 ‘어제’에 세종이 직접 밝힌 창제 취지이다.)
◇최만리 등 “언문은 야비하고 상스러운 기예, 부끄럽다”
우리는 최만리 등의 발언을 직접 접할 수 있다. 상소문 중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구주’는 중국 전역을 가리킨다._필자)
“신라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한자와 분리된 것이 아니옵니다. (중략)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이들 발언을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 읽을 수 있다. 훈민정음에 반대한 신하들은 그것을 중화를 거스르는 큰 사건으로 인식했나? 중국은 주변 국가가 자체 문자를 만들어서 쓸 경우 그것을 중화 질서를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용납하지 않았나? 첫째 초점은 조선 내부의 인식이고, 둘째 초점은 중국의 인식이다.
둘째 질문에 대한 답이 더 간단하다. 신하들은 자체 문자를 창안해 구사하는 국가들로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을 거론했으나, 이들 국가가 그로 인해 중국의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세계사에서 식민·직접통치와 결합된 제국주의 시대를 제외하면 지배 국가가 자신과 다른 문자를 쓴다는 이유로 피지배 국가를 공격한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최만리 등 신하들도 그 정도 역사 지식은 갖고 있었다.
훈민정음 반대파는 훈민정음이 위대한 문자고 한글 창제가 큰 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화를 거스를까봐 걱정한 게 아니라 혹여 중국에 알려질 경우 부끄러운 문자라며 염려했다. 그들은 한글이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않고 야비하고 상스러우며 무익하다”고 그 이유를 들었다.
요컨대 최만리 등은 “명나라가 언문 창제를 알고 노(怒)할까 두렵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실이 중국에 들어가면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우리가 부끄러워진다고 주장했다. 독자 문자를 만들어 명나라의 심기를 크게 거슬러 나라가 위태로워질까 걱정한 게 아니라 명나라를 사모하는 우리가 심히 부끄러워진다고 토로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로 시작하는 1443년 12월 30일(음력)자 기사에서부터 ‘훈민정음’이라고 기록됐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신하들은 상소문에 이 명칭을 한번도 적지 않았다. 왕이 정한 명칭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한글을 못마땅해한 것이다.
◇상소문 정합성 위배, 세종이 정곡을 찌르다
상소문에 정합성을 위배한 대목이 있다. 그들은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소리를 나타내는 이두는 예외로 인정하면서 이두는 형태를 한문에서 따왔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과연, 세종은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을 활용하지 않느냐”고 답변했다. 이어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종의 이 발언은 ‘훈민정음 창제의 주요 목적이 한자음의 정확한 구사’라는 억측을 기각하는 증거 중 하나다. 다른 증거는 〈훈민정음〉의 ‘어제’에 세종이 직접 밝힌 창제 취지이다.)
한편 상소문을 제출한 신하들이 반대한 다른 논리는 쉬운 문자를 쓰는 사람은 우둔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되오면(한자를 익히지 않으면_필자) 수십 년 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라고 개탄했다. 문자의 난이도와 사고력 발달은 상관관계가 약함을 이들이 보여줬다. 어려운 한문을 오랫동안 익히고 구사했으나 이 정도로 사고했으니.
김진명 작가는 같은 인터뷰에서 “단순한 ‘직선 획’의 조합만으로 무한한 소리글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한글의 위대한 수학적 원리죠”라고 말했다. 이는 범주에서 벗어난 주장이다. 잔가지부터 치면, 한글에는 수학적 원리까지는 없다. 또 한글은 ‘단순한 획을 조합해 많은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기보다는 비슷한 여러 음소를 기본 형태에서 획을 추가해서 나타낸 ‘자질문자(資質文字, featural writing system)’라는 점에서 위대하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한글 자음과 모음은 모두 기본형에 획이 추가되면서 확장된다. 예를 들어 ㅁ, ㅂ, ㅍ 으로 획이 더해지면서 관련 음이 표기된다. ㄱ 은ㅋ 과 ㄲ 으로 갈라진다. 영어 알파벳에는 B와 P 외에는 이런 유사음의 형태 유사성이 없다. 그래서 한글은 알파벳을 비롯한 음소문자보다 고도화하면서 동시에 간결화한 자질문자다.
언어학자 스티븐 로저 피셔는 책 〈문자의 역사〉에서 “한글은 모든 문자로부터 독립적이며 완전하다”고 평가한다. 피셔는 한글이 기존 문자를 개량한 게 아니라 언어학적 원리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든 문자라고 설명한다. 이는 한글이 다른 문자를 본떴다는 모방설을 깨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한글이 기존 문자를 바탕으로 삼았다는 모방설은 논리가 아니라 상상 위에 세워진 이야기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옛 전자(篆字)를 모방했다”는 기록은 형태와 관련한 것이지 제자 원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세계인이 한국 문화를 즐기며 그 바탕인 우리말과 한글에 찬탄을 보내고 있다. 외국인이 한글에 관심을 보일 때, 우리가 제대로 알고 설명해야 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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