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전시현 기자 | 스테이블코인이 더 이상 가상자산 업계의 실험이 아니라 국가 통화와 결제 주권을 가르는 인프라 경쟁의 문제라는 지적이 7일 국회에서 쏟아졌다.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열린 ‘스테이블코인 제도 설계를 위한 과제: 해외 사례 분석과 대응 전략’ 세미나에서다. 행사 자료집과 발표 내용을 종합하면 전문가들은 이제 “도입할 것이냐”를 따지는 단계는 지났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유통시키고 어디에 쓰이게 할지를 서둘러 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도입 논쟁은 끝났다… 이제는 ‘실사용’ 경쟁
세미나를 주최한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개회사에서 스테이블코인을 “이미 시작된 금융 질서 재편”이라고 규정했다. 테더(USDT)는 글로벌 거래와 결제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써클의 USDC는 코인베이스를 축으로 미국 금융시장 안으로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민 의원은 특히 원화 스테이블코인 KRWQ를 기반으로 한 무기한 선물 상품이 해외에서 등장한 점을 언급하며 이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발행 자체가 아니라 유통과 사용, 그리고 반복되는 실사용이라고 강조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국민이 일상적으로 쓰는 ‘단골코인’으로 만들어야만 한국이 디지털 금융 인프라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환영사에 나선 김종원 한국블록체인산업진흥협회 이사장도 위기감을 제기했다. 그는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이 이미 관련 법제화와 결제망 정비에 나선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디지털자산기본법 처리가 지연되며 “중대한 입법 공백”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글로벌 시장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 만큼 국회와 업계, 학계가 함께 해외 사례를 정리하고 실제 제도 설계 요소를 선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토큰화 금융의 승부처는 결제 레이어
첫 발표에 나선 이종섭 서울대 교수는 스테이블코인을 자산 토큰화 시대의 핵심 ‘결제 레이어’로 규정했다. 자산을 블록체인 위에 올리는 것만으로는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고, 발행·거래·결제·담보·규칙이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함께 움직여야 비로소 진정한 토큰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토큰화의 성공 조건은 자산 토큰 하나가 아니라 자산과 돈, 규칙의 동시 디지털화”라고 짚었다. 스테이블코인이 있어야 자산 이전과 현금 결제가 동시에 이뤄지고, 장부 대사 역시 자동화돼 운영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글로벌 시장도 이미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블랙록의 토큰화 펀드 BUIDL, 프랭클린템플턴의 BENJI 같은 상품이 잇달아 등장했고 스테이블코인, USDC는 실물자산 토큰화(RWA)와 디파이(DeFi)를 잇는 연결 조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역시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자산, 국경 간 결제망을 하나로 묶는 전략적 구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누가 토큰화 금융의 레일을 쥐느냐가 미래 금융 주도권을 가를 것이라는 진단이다.
▲ 아시아, 달러 스테이블코인 확산에 통화 방어전
김진규 타이거리서치 대표는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한 스테이블코인 경쟁 구도를 설명했다. 김 대표 발표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약 3200억달러 규모로 확대됐지만 이 가운데 99%가 달러 연동형이다. 미국은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한 민간 혁신 수단이 아니라 달러 패권과 국채 수요를 떠받치는 정책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각국이 자국 통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고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국민과 기업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순간, 그 자금이 미국 금융 시스템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는 싱가포르가 규제 허브 전략을 통해 스트레이츠X, 팍소스, 리플, 써클 같은 사업자를 끌어들이고 있고, 홍콩은 별도 법률을 통해 통화 제한이 없는 개방형 구조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스테이블코인에 법적 지위를 부여했고 중국은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전면 차단한 채 디지털 위안화 중심 전략을 펴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한국은 법제화가 늦어지는 사이 역외 원화 유동성 실험과 기관 대상 시범 사업만 먼저 움직이는 형국이다. 김 대표는 “완벽한 제도를 기다리기보다 시장에 먼저 나설 수 있는 속도와 안전장치를 함께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 발행보다 중요한 건 설계… 안전장치가 성패 가른다
서상민 카이아재단 의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실제로 어떻게 만들고 운영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 1년간 국내 논의가 은행이 하느냐 비은행이 하느냐 감독권을 누가 쥐느냐에 집중됐을 뿐, 정작 실무 설계는 비어 있었다는 지적이다.
서 의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단일 시스템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발행·상환 집행, 스마트컨트랙트, 네트워크 접근, 모니터링 등 여러 레이어로 나눠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할별 권한 분리, 다중 서명, KYC·AML, 이상 거래 탐지, 준비자산 실시간 검증 같은 장치가 함께 들어가야 코인런과 불법 자금 유입을 막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해외 송금 실증 사례도 제시했다. 카이아 체인 기반 원화 스테이블코인 개념검증(PoC)에서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10만원을 보내는 데 3분이 채 걸리지 않았고 비용은 기존 약 9600원에서 1250원 미만으로 줄어 약 87% 절감 효과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기존 은행망에서는 1~3영업일이 걸리고 중개은행도 2~4곳 거치지만 스테이블코인 구조에서는 스마트컨트랙트 라우팅을 통해 중개 단계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서 의장은 “한국은 아직 시작도 못한 상황”이라며 발행 허용 여부를 둘러싼 논의를 넘어서, 실제 작동 방식부터 표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국은 제도와 시장 동시 질주… 한국은 입법 공백
김수민 플룸네트워크 한국 총괄은 미국 사례를 들며 한국이 놓치고 있는 지점을 짚었다. 그는 글로벌 토큰화 자산 시장이 스테이블코인을 제외하더라도 약 267억달러 규모에 이르며 월 5~6%, 연간 80~100% 수준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블랙록, 인베스코, 프랭클린템플턴, 아폴로, 위즈덤트리 같은 전통 금융기관은 이미 온체인에서 자산을 운용하고 있고, 토큰화는 발행 비용과 스프레드를 줄이는 실익도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제도적 병목이 여전히 크다고 진단했다. 토큰증권의 법적 지위는 일부 확보됐지만 실제 시행은 2027년으로 밀려 있고, 외국인 투자 경로도 정비되지 않았으며 결제 인프라는 여전히 은행 영업시간과 T+2 관행에 묶여 있다. 현행 외국환거래법상 스테이블코인이 공인 지급수단으로 인정되지 않는 점도 핵심 걸림돌로 꼽혔다.
반면 미국은 대통령 산하 작업반 보고서, GENIUS Act, 증권당국 해석 정비 등을 통해 발행 인프라와 결제 규칙을 동시에 정비하고 있다. 김 총괄은 “완전한 답을 갖춘 나라는 아직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도 기회가 열려 있다”고 말했다.
▲ 진짜 과제는 발행 이후… 유통·규제·외환이 핵심
이날 마지막 종합토론은 보다 실무적인 문제로 옮겨갔다. 조원호 람다256 CEO, 임주영 안랩블록체인컴퍼니 사업총괄, 김경업 오픈에셋 대표, 이환 카이아재단 원화 스테이블코인 TF 리드와 발제자들은 ‘스테이블코인 발행 이후의 정책·산업·법률 과제’를 주제로 토론을 이어갔다.
논의의 초점은 발행사 책임과 준비자산 관리, 불법 자금 차단, 외환 규제, 토큰화 자산 유통, 해외 플랫폼과의 연결 문제 등으로 모였다. 결국 코인을 찍어내는 것보다, 발행 이후 시장에서 어떻게 유통시키고 어떤 규율 아래 관리할 것인지가 훨씬 더 큰 과제라는 데 무게가 실렸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더 이상 가상자산 업계의 신사업이 아니라 통화와 결제, 자본시장 질서를 재편하는 제도 경쟁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한국이 머뭇거리는 사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글로벌 표준으로 굳어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단지 하나 더 만들어지는 코인에 그칠지 아니면 실제로 쓰이는 금융 레일이 될지는 지금부터 어떤 속도와 어떤 설계로 움직이느냐에 달렸다”는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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