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안중열 기자] 가입자 900만명, 선수금 10조원. 고령화 사회의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은 상조업계가 유례없는 외형 성장을 거듭하고 있으나 규제의 칼날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국회와 정부는 ‘선수금 운용 투명성 제고’를 명분으로 금융권 수준의 고강도 규제를 예고했다. 다만 산업 본질을 외면한 ‘정치 논리’가 시장 자생력을 훼손하고, 결국 소비자 피해로 이어지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선수금 10조’가 촉발한 입법…규제 타깃 된 상조업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할부거래에 관한 법률(할부거래법) 개정안’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개정안의 핵심은 현행법상 50%인 선수금 보전 의무 외에, 업체가 내부에 보유한 나머지 50%의 운용 기준까지 법제화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구체적으로는 ▲특수관계인에 대한 대여 금지 ▲자산운용 대상 제한 ▲운용 내역 정기 공시 의무화 등이 포함됐다.
입법 추진 측은 일부 대형 업체의 사모펀드 운용이나 계열사 간 내부 거래 의혹을 근거로 제시한다. 사후 구제 중심인 현행 체계를 사전 예방 체계로 전환하고 ‘선수금의 사금고화’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국회 정무위원회 관계자는 “상조업은 소비자로부터 미리 돈을 받는 구조인 만큼, 그 자금이 불투명하게 운용될 경우 제2의 금융사고로 번질 위험이 크다”며 “공적 감시를 강화하는 것은 입법부의 당연한 책무”라고 강조했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 역시 이러한 방향성에 공감하며 규제 고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 위원장은 “상조업체의 자산운용 방식을 개선하고 회계 지표를 고도화해 소비자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며 “선수금 운용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금융 아니라며 규제만 금융 수준?…‘자기모순’ 지적
업계가 강력히 반발하는 지점은 규제의 ‘법적 정합성’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그간 “상조는 금융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상조 서비스는 미래의 인적 서비스를 약속하는 ‘할부 계약’이지, 자금을 운용해 수익을 돌려주는 금융 상품이 아니라는 논리다.
상조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금융업이 아니라고 규정하면서도 금융권에만 적용되는 자산운용 규제와 내부통제 의무를 이식하려는 것은 명백한 자기모순”이라며 “성격 규정 없는 규제는 법리가 아닌 정치 논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한 자본시장 전문 변호사는 “서비스업에 금융업의 건전성 비율을 강제하는 것은 ‘규제 비례의 원칙’에 어긋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티메프와는 근본적으로 달라”…99.9% 이행률이 증명하는 안전성
일각에서 제기하는 ‘제2의 티몬·위메프(티메프) 사태’ 우려에 대해서도 업계는 사실관계 왜곡이라며 선을 그었다. 에스크로(결제대금 예치) 장치 없이 정산 대금을 자유롭게 인출·전용하며 구조적 결함을 노출한 티메프 사태와는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반면 상조업계는 이미 현행법에 따라 선수금의 50%를 은행이나 공제조합에 예탁하는 강력한 보호 장치를 가동 중이다. 공정위 자료에 따르면 선수금 보전 의무 이행률은 99.9%에 달하며, 위반 업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상조업계 다른 관계자는 “막연한 불안감에 기댄 규제 도입보다는 기존 안전장치가 왜 충분하지 않은지에 대한 실증적 데이터 제시가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획일적 규제의 부메랑…“소비자 보호하려다 소비자 잡나”
상조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규제가 강화될수록 시장 양극화가 심화되고 중소업체가 벼랑 끝으로 내몰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현재 상위 10개 업체가 전체 가입자의 약 71%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형사 기준의 고도화된 운용 규제를 일괄 적용하면, 재무 여력이 부족한 중소형사는 행정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도산할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 관계자는 “영세 업체가 규제 압박으로 도산하면 결국 가입자가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실질적 피해를 보게 된다”고 경고했다. 소비자 보호를 내건 규제가 오히려 소비자를 희생시키는 ‘규제의 역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흥’ 없는 ‘규제’는 산업 위축 초래…“제도적 기반 마련이 먼저”
전문가들은 규제 일변도 정책 대신 ‘상조산업 진흥법’ 등 육성책 병행을 강조한다. 고령화 시대에 장례를 넘어 실버케어, 웰다잉 등 ‘라이프케어’ 산업으로 도약해야 할 시점에 과도한 규제는 서비스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복수의 상조업계 관계자는 공통적으로 “규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 특수성을 무시하고 절차를 건너뛴 ‘불도저식 규제’를 경계하는 것”이라며 합리적인 제도 설계를 촉구했다. 산업 성장 속도에 맞춰 규제의 칼날보다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돕는 정교한 가이드라인이 절실한 시점이다.
Copyright ⓒ 직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